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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 [오재성 베드로 신부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6-20 조회수811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02 여름,

나라가 월드컵 열기에 뒤덮여 있었다.

다소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가면 시큰둥해지고 

반대로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일엔 눈을 반짝이던 오랜 습관대로,

광화문에 붉은 악마며 일당이 얼마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짝 귀를

기울였다가 이내 시큰둥해졌다.

 

하지만 우리 수도원 형제 가운데에는 일부러 시내버스를 타고 광화문까지

나걌다가 차가 막히면 걸어서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수도원에 돌아와서는 "훗날  역사의 순간에 어디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광화문에 있었노라고 말하겠다" 허풍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월드컵 보인 '국민된 성의' 라고는 수도원 형제들과

함께 팝콘을 튀겨먹으며 텔레비젼을 통해 축구 중계를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여름휴가를 받아 미련없이 고향으로 훌쩍 떠났다.

 

역시 고향은 변함없이 꿋꿋하였다,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쩔쩔 끓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없이 밭에서 얼굴이 발갛게 익고 있었다.

 

고향 사람들 역시 대한민국 국민들이므로 월드컵의 열기를 아주 비켜갈

수는 없었다.

농사일 바쁘고 고된 가운데서도 역시 '세대가 다른' 젊은 축들은 역시 생각

하고 행동하는 것도 달랐다.

 

우리 동네가 생기고 나서 역전 광장에 면민들이 그렇게 많이 '자발적'으로

모인 것은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술기운에다가 승리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붉은 얼굴로 역전에서 돌아온

형이 내게 일러주었다.

 

형은 며칠 전에도 형수랑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이런 경우는 드물다)

서울까지 원정을 붉은 악마들과 '~한민국'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돌아왔단다.

 

열정에 새삼 놀란 나는,

광화문까지 갔다가 수도원까지 걸어서 돌아온 형제는 그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월드컵과는 당최 상관이 없어 보였다.

나라가 월드컵 열기로 들끓던 여름에도 어머니는 당신이 한평생을

보내신 밭에서 아무일 없다는 듯이 일을 하고 계셨으니까..

 

집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밭으로 출근을 했다.

수도원에 사는 동안 낯모르는 이들이 나를 보고 "뭐하는 사람이냐?"

물을 적마다 웃으며 '놀고 먹는 백수' 라고 대답하곤 했었는데,

 

놀고 먹는 백수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래서 쉬라고 휴가까지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휴가를 받아 고향에 오면 그야말로 다리 뻗고 누워 있을 새가

없는 것이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 짓는 부모를 이들의 운명이랄까?

 

그렇다고 그것에 불만이 있을 없는일,

, 한동안은 멀쩡한 놔두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는 죄를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한동안' 내게 수도원의 휴가 라는 것이 밀린 숙제를 하는 것처럼

밀린 효도를 하는 기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제 밭에서 일하시는 연로한 부모님을 보면 누가 곁에서 효도 운운하지 않아도 젖먹던 힘까지 쏟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을 도와 착실하게 밭에서 휴가를 보내던 어느 날,

어찌된 영문인지 전례없이 우리나라가 16강에 들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슬슬 나의 청개구리 기질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수도원 형제들이 축구를 보며 광분할 적에는 잠시 흥분하다가 말았던 내가,

정작 고향에 돌아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너무 무심한 어머니를 보고는

안타까웠던 것일까?

고향에 와서는 갑자기 열열한 축구팬이 되었다.

 

오이를 따며 '히딩크'가 어떻고..

고추를 따며 서울 시청 앞에는 얼마나 많은 '붉은 악마'들이 모였으며

온 나라가 얼마나 난리인지 간간이 중개방송을 하면서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지만, 어머니는 그저 그런 표정이셨다.

 

하지만,

월드컵 8강전이 열리던,

여름 휴가가 끝나기 하루 전날 나는 전에 없이 흥분한 어조로 아침부터

밭에서 떠들어댔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8 강전을 봐야겠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된 도리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면에서 최소한의 예의쯤은 되지 않을까?

 

어쨋던 나는 한평생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에게

'쉬고 노는 것'의 필요함과 중요함을 알려주고 싶었다.

욕심을 내면 인생의 다채로운 맛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럴 능력이 없었으므로,

모처럼 주어진 전 국민적 오락거리인 월드컵 경기나마 수박을 잘라 먹으며

가족들과 함께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아버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나도 8 강전을 보아야 한다!" 하셨다.

어머니는 두 남정네가 아침부터 오랜만에 의기 투합하여 만들어낸

그 대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날은 처음으로 오전 한나절만 일을 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경기 시작 한참 전인데도 벌써 시작한 중계방송을 틀어놓고,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탕수육과 고량주를 시켰다.

그것을 다 먹고 난후에야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경기 시작 5 분도 안 돼 어머니는 주섬주섬 일어나시더니

"난 축구에 관심이 없어 밭에나 나가볼란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뜨거운 불볕 속으로 어머니는 곧장 밭으로 나가셨고

나는 집에서 전 후반, 그리고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대한민국이 승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승리의 감격도 잠시, 해 저무는 것을 보며 어머니를 모시러가는 길의 심사가

편치 않았다.

 

어머니는 혼자서 고추밭의 김을 매고 계셨다.

나는 저만치 형의 고물차를 세워놓고 어머니께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하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일손을 멈추지 않으시고

"이제 막 해가 져서 선선해 지는데...  이때가 일하기 딱 좋은 때다." 하시며

당신은 좀 더 김을 매다 갈테니 너나 먼저 들어가라 하셨다.

 

그렇게 몇 차례 옥신각신한 끝에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  아들이 중요해,  일이 중요해?"

그 소리에 나 자신이 놀랐다.

언제 내가 어머니께 이렇게 화를 내 본적이 있었던가?

놀라신 어머니는

"그래그래,  가자 , 가자!"  하시며 부리나케 연장을 챙기셨다.

 

그 한마디로 휴가 동안의 내 모든 알량한 효도는 물거품이 되었고,

수도원으로 돌아온 나는 반 년 이상 앓았다.

그리고 그 기간은 내가 살아오며 가졌던 세상과 인생,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허상과 우상이 깨어지는 시간들이었다.

 

즉,

내가 어머니를 나(자식들)와 연관해서만 보지 않고

어머니만의 고유한 인생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고,

'나' 라는 좁은 틀에 갇혀있던 하느님이 비로소 풀려나신 것도 그 즈음이다.

 

그 회개의 효과는 매우 커서,

나는 '내가 지어낸' 사랑 또는 효도라는 올가미를 벗어나

요즘엔 바쁜 농사철을 피해 휴가를 가는 요령도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를 통해 발전(?),  변함없는 고향이 내게 준 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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