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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03 조회수895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6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Jesus said to him,

“Have you come to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have believed.”

(Jn 20,29)

 

 


 

제1독서 에페소 2,19-22

 

복음 요한 20,24-29

 

어떤 사람이 선착장 끝에 앉아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서는 “몇 마리나 낚았소?”라고 물었지요.

“글쎄요. 몇 마리를 낚았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말끝을 흐리는 이 사람의 말에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금 재촉하며 묻습니다.

“그래도 낚은 것이 있을 게 아니오? 그 낚은 것이 몇 마리요?” 이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을 합니다.

“지금 입질하고 있는 요놈에다가 앞으로 두 마리를 더 잡으면, 나는 세 마리를 잡게 되는 것이오.”

그렇다면 낚시하고 있는 이 사람은 지금까지 몇 마리를 잡은 것이죠? 아직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이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직은 한 마리도 잡지 않았지만, 세 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세 마리를 잡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자신감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 하는 것에 의심을 가지고 부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생각나네요.

아주 유명한 스승님이 제자들을 앞에 모아놓고서 “모든 것은 완벽하다. 삶은 완벽하다. 모든 인간은 완벽하다.”라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말에 제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섭니다. 그는 꼽추였지요.

“삶이 완벽하다고요? 저를 보십시오. 이 힘겨운 꼴을! 이 정도면 삶이 완벽하다는 스승님의 생각을 뒤엎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꼽추인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네는 지금까지 내가 본 꼽추 가운데서 가장 완벽하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행복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하나씩 달아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불행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게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상황을 행복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담으면 행복으로, 불행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담으면 불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우리들에게 주신 자유 의지라는 것은 바로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선택할 수 있게끔 하는 우리들의 의지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 사도는 동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예수 부활의 소식은 분명 기쁜 소식이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는 그 소식을 불행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담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고 의심합니다.

후에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은 바로 믿음으로써 내가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불행도 내 자신이 만들어 낸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자신 있게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가장 완벽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한 면을 따져봅시다. 완벽한 눈, 완벽한 코, 완벽한 입…… 너무 많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좋은 글'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
상대방의 모든 걸 헤집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이해하며 너그러이 바라 볼 수 있는지
노력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 마음을 들추어 억지로 캐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없는 마음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그 마음을 읽어 내려 갈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
살아온 키를 마름질하여
내 몸에 꼭 맞는 치수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키에 걸맞은 넉넉한 옷을 입힐 줄 아는
포용심을 꾸준히 기를 줄 알아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나, 너 이해해.."하면서도
어느 순간 상대방의 입장보다는
"나"라는 주체를 앞세우며
"~하지만"이라는 반대급부로
나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서로가 서로를 알아 간다는 건
부족함과 모자람을 모진 언행으로 질타하며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잔을 내 어깨에 기울여

다만 넘쳐 흐르지 않는
절제의 미소로 가득 채워 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한 단계 한 단계 배우고 익히며
키워 나가는 것은 아닐런지요
.

 

 “Unless I see the mark of the nail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into the nailmarks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Jn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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