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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복음묵상]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15 조회수534 추천수2 반대(0) 신고

2006년 7월 15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제가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10,24-25)

 

 "No disciple is above his teacher,
no slave above his master.
It is enough for the disciple that he become like his teacher,
for the slave that he become like his master.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외에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타이르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

 

 나라든 교회든 또는 회사든 인재를 발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그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일이 있습니다.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도다양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많이 배운 사람도, 적게 배운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목의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때마다 필요한 사목자가 부족합니다. 많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선뜻 나서는 지원자가 필요합니다.

 

 

† 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은 이유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세상이 진리와 봉사와 사랑을 피력하는 복음의 근본정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 또는 세속의 본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심을 표하게 되고, 무관심은 독선(獨善)을 조장하고 적대심은 박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박해를 피하는 길은 복음을 등지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흥정을 벌이고 급기야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복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의 운명을 복음선포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선포자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며,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성령께서 선포자를 동반하실 것이고, 그 길 끝에는 천상의 월계관이 선포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실제적 박해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끝까지 항구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루가복음에서와는(6,40) 약간 다른 맥락으로 기록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24-25절)는 말씀은 복음선포자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팔자(八字)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엘제불(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9,34) 모함을 받았으니, 복음선포자도 같은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25b절) 결국 예수님과 복음선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같은 팔자며 운명이다. 이는 사도 바울로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자의 운명공동체(運命共同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시는 성삼(聖三) 하느님의 생명공동체(生命共同體)에로 질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복음선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박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28절)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집회 1,14) 따라서 복음선포자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히 배운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상황이 요구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목숨도 아무 값없이 그저 바쳐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어떤 순교도 순교자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을 날고 있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복음선포자를 이런 참새보다도 훨씬 귀하게 여기시며, 각각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실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30-31절)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 앞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극한 박해에 직면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미소한 손해에서부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취한 태도만큼 그분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선포자와 예수님 사이에 종말론적인 ‘동태(同態)보상률’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복음선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마르 8,38; 루가 9,26)...........◆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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