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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작고 짧은 소개-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7 조회수755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가 성 요한의 [정화단계 와 이중적인 구분]은 반드시 순서적이고 차례적인 것이 아닙니다.
단계(감각 정화/영혼 정화)와 구분(능동적 정화/수동적 정화)은 '나열이 아닌 병행'의 관계 입니다.


감정, 육신, 마음, 영혼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영혼" 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초점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합일]에 맞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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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정화의 양상에 따라 능동적 정화와 수동적 정화로 나눈다.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체험에 있어서 수덕> <하느님의 은총>의 총체적인 이중적 국면이다.

즉,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자세로 노력하는 능동적 정화>와

당신께로 초대하시고 이끄시는 <초자연적 은총인 수동적 정화>의 병행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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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정화의 단계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외부세계 즉, 감각세계 그 자체를 나쁘다거나 유해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방해한다고 해서 감정이 영적 생활에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금욕주의가 아니다.

십자가는 인간적 감정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무감각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인간 예수님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물, 피,성령)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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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맛으로부터 그 의지가 이탈하지 못한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 시킬 수 없다.
 피조물들의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은 우선 우리의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사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닮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모든 행동(실천적)들은 참아 견딜 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다. 

 “순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외에 다른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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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각의 정화 :  - 감각, 욕망, 자애심- 에 대한 정화 ]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하며,

둘째는 하느님의 영예와 하느님의 영광에서 기인하지 않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영혼"이 포기하는 일이다.

여기서 <비움>이 필요하지만 <비움>이 먼저이냐, 아니면 <은총>이 먼저이냐 하는 것은 별 소용없는 토론이다.

사람의 노력이 당연히 필요하나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비워지지 않습니다.

즉, 제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의 빛으로 완성 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들에 대한 반격을 행하여야만 한다.

성인은 마침내 자애심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 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묘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 한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

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느님 사랑이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영혼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영혼의 절대적인 자아 포기와 깊은 겸손(순종)이다.
 
메마름과 맛없음은 새로 지은 죄나 결점, 우울증, 해이와 미온에서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화적인 메마름은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과 함께 열심히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신뢰할 일이니, 당신은 그들을 그저 맑고 밝은 사랑의 빛으로 인도하시기까지

갈 길에 필요한 것을 꼭 주실 것이고, 그들이 하느님 은혜를 받을 만큼 자격을 얻으면 영의 어둔밤을 통하여 저 빛을

주실 것이다.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은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겨운 내리심인 까닭이다.
 
하느님의 비추심("그리스도께서 비추시리라")으로 얻게 된 비참한 실상의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초월하심에 대한 인식이 나오게 된다.
자기와 자기 비참에 대한 얽매임이 아닌

하느님 빛(은총)으로 말미암은 인식으로 <영성적 겸손>을 얻게 된다.

이 영성적 겸손으로 인하여 감성의 오만, 마침내는 영성의 교만에 딸린 일체의 악습들이 씻겨져서
영성의 길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 참된 겸손은 순종 / 섬김에로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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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간단계 / 조명 -

십자가의 성 요한이 ‘중간 단계’를 구분한 것은 전통적인 영성 생활의 세 단계인 ‘정화-조명-일치’의 도식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내적 시기의 상태를 보시고 각자의 회개의 때를 기다리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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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의 정화 : - 이성, 기억, 의지 - 에 대한 정화 ]

환시나 계시, 그 밖의 천상 사정에 관한 감미로움은

영성 생활을 하는 이들의 관심사이지만 이 모든 것도 가장 작은 겸손한 행동과는 비길 수 없다.

왜냐하면 겸손은 애덕과 같은 결과를 갖고 있어서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선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더 적극적인 노력 즉 영적으로 하느님께 집착하고자 하는 노력에로 넘어가는 시기이다.
세 가지 향주덕(믿음,희망,사랑)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찾도록 만드는데에 있다
.

다시 말해서 영의 정화란 결국,
이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인식하게 하고,
기억으로 하여금 희망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원하게 하며,
의지로 하여금 사랑을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데에 있다.

[신덕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 '삼위하느님과의 합일'/완전/거룩함 이다)]

이성이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서는 신덕에 의해 이끌어져야 한다.

신덕은 이성을 어둡게 하고 비게 함으로써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신적인 어떤 것들을 인식하기 위해서 영혼은 이성을 통해서 습득한 모든 것들을 제쳐두고

오로지 신덕(말씀의 믿음)이 하느님께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원한 행복에 대한 망덕(희망)은 영혼으로 하여금 세속적인 것에서 이탈하여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원리로 망덕(희망)이 기억을 정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큼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기억은 오직 최고 선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영혼의 힘은 그 기능과 감정과 욕구에 있고 이 모든 것은 의지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의지가 이 기능과 욕구를 하느님게 향하도록 하고

하느님 아닌 것에서 빗나가게 하면 그 때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힘을 간직하는 때이니

바야흐로 영혼은 모든 힘을 다하여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온갖 우상)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감소시킨다.
따라서 영혼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써 피조물을 사랑해야 한다.
이 때의 피조물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정화된 사랑]이다.

고통을 성인은 어둔밤에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이 관상의 빛과 지혜가 매우 밝고 맑은 반면 / 빛을 받는 영혼은 어둡고 불결하다함은

마치 흐리고 언짢고 병든 눈에 밝은 빛이 쏘아 들어오면 아파지는 것처럼

빛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도 아프다는 것이다.”
 
“둘째, 영혼이 그의 자연적, 영성적 약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 신령한 관상이 영혼을 굳세게 만들고 휘어잡을 양으로 하나의 폭력을 쓰는 까닭인데

가뜩이나 약해서 괴로운데다가 더구나 호된 힘이 쏘아 붙일 경우이면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른다.”

십자가의 길을 이때 걷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까지는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면 안된다)

성인의 이러한 설명은 하느님의 빛과 사랑이 고통과 아픔의 원인이 된다 것이다.

즉 완전한 밝음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나아가기 위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에게 들어가기 위해, 빛 때문에

장님(무를 이룬다)이 되고 사랑의 아픔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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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그 뿌리를 살진 토양에 깊숙히 박고 있을 때만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인간도 근원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하나가 되어,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과 세상에 열려 있는 겸손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서게 될 때

비로소 구원이 열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신앙의 성장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데 있다.

우리는 세상에 의해서 또는 우리의 잘못된 시각에 의해서 비뚤어진 감각 혹은 감정을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정화 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일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간구 해야 한다.

즉, 우리 내면의 감정을 개방하여 하느님 앞에 드러내 보여야 한다.

우리의 감정과 한계가 드러나는 그곳에 노력과 절망이 드러나는 자리에 하느님의 빛이 개입하게 된다.

"순명(빛에 대한 복종) 없는 고행은 짐승들의 고행일 따름,
 그렇다면 거기서 얻는 맛과 탐욕에 움직이는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영혼의 음란한 우상을 없앰)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에 이르기 전까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십자가의 신비]를 몸소 체험하며 신앙의 깊이를 다져 가야 한다.

십자가는 목적을 향해 나가는데 있어서의 지팡이이며 요한에게는 ‘길’이요 체험의 근본 된 상징이었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을 뜻한다.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표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머리에서 떠난적은 결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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