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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7-29 조회수63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25-26)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an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오빠 라자로의 죽음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활이시요 생명이심을 선언하십니다. 마르타는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합니다

 

☆☆☆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기적 사랑인 에피튜미아, 성적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헌신적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처음엔 대부분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헌신적 사랑으로 완성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헌신적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헌신적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그분의 사랑은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견주면 아주 미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모두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어쩌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는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 되고 있는데, 루가복음 10장에 3번(38, 40, 41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다.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부호(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소생(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4) 루가복음에서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그것을 마리아가 택했다고 하셨다.(루가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불리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장)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일찍이 베네딕토 성인(470-547)은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녀 마르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며(요한 11,27),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절)과 마르타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상가(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가 10,38-42 참조)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오빠가 소생하기도 전에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蘇生)시키심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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