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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4 > 수련장님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3 조회수926 추천수11 반대(0) 신고

                        

 

 

                            수련장님


   나에겐 노인친구가 한 분 계시다.  친구라고 소개하기엔 송구스러우나 달리 표현하는 것이 웬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나는 그분을 “수련장님”이라고 부른다. 그분이 몇 년 전 광주 월산동 본당에서 광주지역의 프란치스코 재속3회 수련장 일을 보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뵈온 것은 신학교 시험을 치기 위해 예비고사를 준비하던 때였다.


   하루는 낯 모르는 어떤 노인이 산중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찾아 오셨다. 내가 신학교 시험 준비한다는 것을 용케 아시고 몇 집을 더듬어서 찾아오신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에 아는 이가 없었고 나이도 많은 데다가 어디 내놓고 공부할 처지도 못 되어서 암자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이었다.


   나는 원래 충청도 사람이다. 신탄진에서 태어나 천안에서 6.25를 겪었으며 대전으로 이사해 그곳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12년 정도 했었다. 그 후에 다른 일을 몇 년 더 했으니 제자들은 이미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많았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난 신부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에 원서 한 번 내보지도 못한 채 선생이 되긴 했으나 그 소망을 아주 버린 적은 없었다. 나중에 때가 되었을 때는 수사가 되고자 수도원 문을 두드렸으니 그곳이 광주시에 있는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였다. 내 여동생이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 같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간호수사의 길을 선택햇던 것이다.


   그러나 수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겸손한 수사가 되겠다는 애초의 꿈은 자꾸 퇴색되어 갔었고, 이미 단념했으면서도 신부가 되고픈 꿈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수도회는 신부를 양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1년여 만에 수도원을 나왔으며 결국 찾아든 곳이 시내 변두리에 잇는 ‘홍선암’이라는 작은 암자였고 본당은 월산동으로 옮겼다.


   수련장님은 나를 항시 “요한 형”이라고 부르셨다. 일흔이 다 되신 노인한테서 ‘형“ 소리를 듣는것이 송구스러워 제발 말씀을 낮추시라 해도 그분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만 하셨다. 그리고 가금 한잔씩 마셔야 공부가 잘된다고 하시며 호주머니에 소주병을 여러 번 넣어 오셨다. 게다가 수련장님은 나를 항시 신학생 그 이상으로 대해 주셨다. 도무지 황송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으나 한편으로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한번은 사진을 좀 달라시기에 오래전에 찍었던 것을 한 장 드렸더니, “그때는 인물이 참 좋았었군” 하고 인물평까지 해주시면서 그 못난 것을 당신의 기도방에 놓으시고는 아침 저녁으로 나의 성공을 빌어 주셨다. 내가 서서히 공부체질, 기도체질로 바뀌게 된것은 그 분의 기도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학교의 합격통지서를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신부가 못 되면 신학교에서 변소 푸는 작업이라도 하겠다고 별렀던 나는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우선 수련장님을 대포집으로 모셨다. 그런데 수련장님은 나보다 먼저 알고 게셨다. 심지어 내 시험성적이 어떻다는 것까지도 환하게 알고 계셨다. 알고 보니 그분은 바로 내 본당인 월산동 본당 신부님의 춘부장이셨다. 나는 그 사실을 몇 달 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다.


   수련장님은 그렇게 겸손한 분이셨다. 당신 자신은 그처럼 낮추고 감추시며 다른 사람을 존경해 주시니 모든 분들이 수련장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분은 늘 밑에서 일하는 것을 즐기셨다.


   신학교 2학년 말에 나는 본당을 월산동에서 목포 경동으로 옮겼다. 방학이면 아는 이가 없어 고통을 겪는 나에게 그곳 신부님이 숙소를 마련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산동 신부님은 나보다 먼저 떠나셨는데 이젠 신부님이 아버님을 모신다는 소식도 들었다. 


   살다 보면 누군가에 업혀서 편한 길을 걷기도 하며, 걷다보면 발밑에 누군가의 아픔이 깔려 있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인생을 살 때가 많았다. 혼자 걷기 힘든 길을 누군가에 업혀 갈 때도 있었으며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내 아픔을 대신하여 신음하는 것도 보았다. 신학교에서도 그랬으며, 수련장님이 늘 내 곁에 계신 그때도 그러했다.  


   나는 벌서 연구과생이며 수련장님은 여전히 건강하시다. 여든이 가까우신데도 성서연구, 레지오 활동 등, 얼마나 힘차게 생활하시는지 모른다. 마치 사도 바울로의 삶처럼 성령의 은총이 충만한 생활을 하고 계신다. 젊은 신학생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아들 신부님이 본당을 비운 지도 넉 달이 넘는다. 누구 때문이라고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목자도 양도 가슴아프기만 하다. “허허!” 웃기만 하시는 아버지의 속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실까?


   지난 여름엔 남동 성당에서 여러 차례 수련장님을 뵈올 수 있었다. 아들 신부님이 몇 달째 교도소에 계신 아픔 속에서도 슬픈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으며, 하느님과 더 깊이 만나게 된 체험을 들려주셨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온 짧은 생애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많은 수련장님들을 만나곤 했다. 내가 너무도 약하고 부족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은 그분들의 지도와 도움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채워 주셨던 것이다. 지금은 ‘수련장님!“ 하고 부르면 당신은 이제 수련장이 아니라면서사양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내 삶에 잇어서 소중한 수련장이시다. 그리고 내게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시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친구라는 것이 결국 손주들이 아니겠는가!


   은총은 여러 가지이지만 수련장님을 통한 주님의 사랑도 퍽 감격스럽다.


  하늘에 대고 소리 한 번 지르고 싶다.

   “수련장님, 오래 사세요!”

   한 번 더 외치고 싶다.

   ‘신부님, 아버지가 기다려요!“

http://my.catholic.or.kr/vegabond


 

   

     -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중에서 / 강길웅 요한 신부(소록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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