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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안네 신부님의 선택과 집중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4 조회수976 추천수15 반대(0) 신고
8월 4일 금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마태오 13장 54-58절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비안네 신부님의 선택과 집중>


비안네 신부님의 성소여정을 따라가 보면서 정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786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혼란하던 시기 리옹 근교에서 탄생.


1799년(13세) 박해상황에서 비밀리에 세례 성사를 받음. 목숨 걸고 사목하던 그로보즈 신부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사제성소의 꿈을 간직.


1806년(20세) 비안네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아버지 신부였던 발레 신부와 함께 3년간 예비신학생 기간 보냄


1812년(26세) 발레 신부의 추천으로 리옹교구 신학생으로 소신학교 입학. 최선을 다했으나 기초교육의 미흡과 라틴어 수준 미달로 2학년 진급 불가 판정. 다시 발레 신부에게 돌아와 보충수업 시작


1813년(27세) 보충수업을 마치고 리옹의 성 이레네오 대신학교 입학.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학업능력 결격자로 판정되어 또 다시 발레 신부에게로 돌아옴. 발레 신부의 개인지도로 신학 공부 계속.


1814년(28세)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시험을 쳐서 합격. 차부제품.


1815년 6월 23일 부제품.


1815년 8월 13일 최종 시험을 합격했으나 조건부 합격. 고해성사 집전이 유보된다는 조건으로 합격.


오늘 비안네 신부님의 성소여정을 묵상하면서 참으로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사제로 서품되면서 ‘부끄럽게도’ 얼마 동안 고해성사 집전권이 유보되었습니다. 사제로 서품되었지만 사제로서 가장 일상적이고, 기본적이고, 중요한 성사인 고해성사를 집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 당국은 비안네 신부님이 아직도 고해성사를 집전할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비안네 신부님이었지만, 그는 후에 ‘고해소의 성인’이 됩니다. 고해성사 본 사람들 숫자로 본다면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성사를 집전한 사제였을 것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회심의 마음을 불러일으킨 사제였을 것입니다. 거의 매일 하루 12시간 이상 고해소에서 사목하셨으며, 말년 어떤 날은 17시간까지 앉아있기도 하셨답니다.

 

‘고해소의 성인’ 비안네 신부님께서 한때 자격미달의 신학생으로 여러 번 중도에서 하차해야 했다는 것, 최종적으로 자질부족으로 판명되어 사죄권이 유보되었다는 사실, 생각하니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사제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숱한 난관과 시련을 겪었던 비안네 신부님은 그럴수록 더욱 사제직을 향한 열망을 불태웠습니다. 사제직의 고귀한 품위와 고해성사의 놀라운 은총에 대해 그 어떤 사제보다 깊이 느끼고 체험하였으며 감격했습니다.


오늘 비안네 신부님의 축일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단순화시킨 분이라는 묵상.


사제로 살아가지만 마음이 늘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거리는 제 모습이 엄청 부끄러운데, 그에 비해 비안네 신부님은 부차적인 것들에 대한 신경을 완전히 끄셨습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단행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영적인 것, 하느님, 영성생활, 신자들의 영신생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세상 것들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나 가재도구, 메이커 옷, 취미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제관은 거의 ‘유령의 집’과도 비슷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하루 온종일 신자들 영성생활의 쇄신을 위한 고해성사에 전념하셨습니다. 성스런 미사 준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셨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여기에 비안네 신부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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