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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5 조회수573 추천수7 반대(0) 신고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은 참 아름답고 신비롭다. 작년 가을이었다. 수녀원 마당의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인간의 탐욕 탓으로 파괴되고 병들어 가는 자연을 보면서 자연 그 자신도 슬퍼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데, 봄날이라는 내일의 새 생명을 희망하며 버리고 떠나는 자연의 겸허함은 변함없었다.


   붉게 물든다는 것은 사실 죽음을 향한 색깔인데, 그 빛이 그렇게 찬란한 환희로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몫으로 주어졌던 삶에 충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자연이 주는 메시지를 읽으면서 때때로 이런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하느님을 닮은 피조물, ‘사람’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각 사람이 지닌 그만의 향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까.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더불어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걸어 오면서 사람들과의 만남 그 자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큰 축복이며 은혜임을 느끼게 된다. 그 중에 나를 괴롭힌 사람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길목마다 함께하며 내 삶을 이끌어 주었던 사람들,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자연에서 본 아름다움은 눈앞에서 멀어지면 회상의 뜰 안에서도 그 영상이 흐려지지만, 사람에게서 체험한 아름다움은 눈앞에서 멀어져도 그 영상은 마음에 새겨져 사라질 줄 모른다.


   나에게는 평범함 속에 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특별한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내가 그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나 힘든 일에 부딪힐 때마다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빅토리아 수녀님, 레오 수녀님, 에스티발리 수녀님, 그 외에도 많은 연로하신 수녀님들…


   그분들은 모두 내게 ‘어떤 삶을 아름다운 삶이라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신 분들이다. 한국에서의 역사가 짧은 수녀원에서 젊은 수녀들과만 어울려 살다가 다른나라에 있는 우리 수도회의 은퇴 수녀님들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학교 다닐 때였다. 이국의 수녀님들이었지만 각자의 향기를 지닌 연세 높으신 수녀님들의 생활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경탄이었고 은총이었다.


   그분들이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더 깊게 섬길 수 있을까’ 하는 것, 육체적인 질병과 고통도 하느님과 사람들을 향한 그 수녀님들의 기도와 사랑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레오 수녀님은 예순이 다된 암 환자였다. 늘 웃고, 식탁에 앉으면 언제나 재미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주셨다. 수녀원은 작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인구 2천 명 정도의 평화로운 시골마을 한가운데 있었지만, 생로병사와 함께 하는 인간의 삶인지라 수녀님은 매일 마을에 있는 아픈 사람들, 슬픔과 괴로움이 있는 사람들, 혼자 사는 노인들을 방문하러 가셨다. 도대체 누가 성한 사람인지 누가 환자인지, 그런 수녀님에게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암 환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상태가 조금 더 악화되어 레오 수녀님은 진통제가 든 링거 주사를 맞게 되었는데 다른 한 손으로 그 병을 쳐들고 마당에 서서 이야기하고 계셨다. 마침 수녀원에 들른 신부님이 그 모습을 보고 어디 아프시냐고 물으셨다. “아, 저요? 저 암환자예요! 주사 맞는 거예요!” 웃으시며 남 이야기하듯 말씀하시는 수녀님을 보고, 신부님은 몇 번이나 정말이냐고 되물으며 믿지 않으셨다, 옆에서 “정말 암 환자 맞아요”라고 확인시켜 줄 때까지.


   그 해 여름, 수녀원 마당 버찌나무 밑에 앉아 “수녀님, 죽는 것이 두렵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하느님께로 돌아가니까. 그런데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마음 아파. 올 겨울을 넘기지 못할거야”라고 대답하셨다. 수녀님의 말씀대로, 의식을 잃기 전까지 여전히 사람들에게 웃음과 위로를 주다 그 해 겨울, 미소 띤 얼굴로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빅토리아 수녀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본다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늙고 쇠잔한 사람, 게다가 시력까지 완전히 잃어버린 할머니 수녀님이셨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동생들과 고아원에 들어가셨고, 18세에 수녀원에 입회해 95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연세에도 수녀님의 기억력과 총기는 아주 특별했다. 수녀님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교회, 선교, 세상 사람들, 세상의 평화, 수녀원 식구들, 마을 사람들, 수녀님에게 기도를 부탁한 사람들과 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수녀님의 사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침대에만 누워 계시는 수녀님을 위로하기 위해 자주 방문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위로와 평화를 얻어 갖고 갔다. 환영이 가득 배어나는 특유의 웃음, 육체적인 고통을 한 번도 불평하지 않는,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와 일치했다고 기뻐하는 모습,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눈을 크게 떠 상대방을 향해 있는 눈동자… 수녀님의 마음과 귀는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녀님을 위로하러 왔다가 오히려 그들의 고통과 기쁨을 털어놓고 갔다. 그래서 방문을 한발짝도 나서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수녀원과 동네 소식을 가장 잘 알고 계셨다.


   페르난도와 벨렌 부부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도, 글로리아 아줌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가장 먼저 아셨다. 함께 살았던 몇 년 동안 수녀님이 슬퍼하는 모습을 꼭 한 번 보았다. 다른 곳에서 여름 방학을 지내고 돌아와 “수녀님, 얼굴이 야위셨어요. 그동안 더 많이 편찮으셨어요?”라고 묻자 쓸쓸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눈이 보이니까 나를 보고 이런 말 저런 말도 해 주는데… 나는 볼 수 없으니 얼굴이 좋아졌는지, 힘드는지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어.” 보이지 않아 상대방에게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없다는 아픔이셨다.


   학교를 마치고 떠날 때, “데레사, 이젠 우리 만남은 이게 마지막일거 야. 네 나라로 돌아가서 내 죽음 소식을 받게 되면 손뼉치면서 기뻐해 줘!” 하셨던 수녀님. “아니요. 슬퍼서 엉엉 울거예요… 그런데 왜 손뼉치며 기뻐해야 돼죠?”라고 농담하듯 묻자 수녀님은 “야! 이제 빅토리아 수녀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환히 내려다보고 계시겠구나. 기쁘다!” 하고 손뼉치며 좋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에서 계속 기도하겠다고 하셨다.


   수녀님은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내 안에 환한 웃음으로 살아 계신다. 수녀들을 통해서 본 아름다운 삶은 특별한 것에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 향해 열려 있는 마음, 귀 기울임, 부드러운 말, 이해와 받아들임, 따뜻한 미소, 한마디의 기도, 무엇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기는 데 있었다. 타인의 이목을 내게 집중시키려 하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하려는 소망으로 매일 하느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적시는 참사람의 삶을 살려고 하는 데 있었 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삶, 성격, 사고, 선택과 행동, 약점과 장점이 나를 힘겹게 만드는 걸림돌이 아니라, 내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는 십자가의 아름다움이 되기를 바라며 해가 지는 시간이면 주님 앞에서 그날 하루의 삶을 되돌아본다.


   내 둘레에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크고 소중한 하느님의 선물이 어디 있겠는 가!



                      - 황경희·데레사 수녀 / 마리아의 딸 수도회

 

                  

                                            흐르는곡/ ♬ 성모님께 바치는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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