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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제자들의 시비지심과 예수님의 측은지심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7 조회수724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6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 14,19-20) 

 

 

Taking the five loaves and the two fish,

and looking up to heaven,
he said the blessing, broke the loaves,
and gave them to the disciples,
who in turn gave them to the crowds.
They all ate and were satisf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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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빵의 기적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며 고행하실 때,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유혹의 하나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물질 만능주의를 경계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배고픈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는 마음 때문에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빵의 기적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데도 먹고 살아갑니다. 한 번도 공장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도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조그만 씨앗 하나에서 30배, 60배, 100배, 아니 수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늘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의 시비지심과 예수님의 측은지심

-박상대신부-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마태 4,12) 예수께서 오늘은 그의 죽음소식을 접하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마 요한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육로를 통해 몰려들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든지 이렇게 사람들로 붐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했을 터인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다. 타인의 어렵고 가엾은 처지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사람다운 사람’의 가장 기본 태도이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맹자(孟子, BC. 372-289?)도 이미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의 발로를 사단(四端)으로 보았다. 사단은 군자(君子)가 행해야 한다는 네 가지 품성인 사덕(四德)에 해당하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사단은 곧 인(仁)에서 우러나는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남을 공경하고 겸손히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맹자가 정리한 사단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한층 돋보이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려오고 스스로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자 때는 저녁이 되었다. 동시에 제자들에겐 끼니걱정이 함께 엄습하였다. 제자들은 그나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군중을 해산시켜 끼니를 각자가 해결하도록 할 참이었다. 시비지심의 발로인가? 그러나 제자들의 시비지심보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앞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뿐, 자기들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께 청하여 사람들을 헤쳐 물리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되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란 말인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태오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다. 4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2-44; 마태 14,13-21; 루가 9,12-17; 요한 6,1-15)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8,1-9; 마태 15,32-39)의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알다시피 오천 명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으나, 사천 명의 기적은 마르코와 마태오만 전하고 있다. 물론 마르코복음이 구전(口傳)이나 예수어록의 원전(原典)에 제일 충실했을 것이고, 마태오와 루가복음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소 수정을 가하였으나, 요한복음은 원전의 기적사화를 토대로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펼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 비유설교(13장)와 공동체설교(18장) 사이에 등장하는 주된 모티브는 ‘빵’이다. 적어도 마태오복음 14,13에서 16,12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빵’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4,13-16)으로 시작하여, 그 가운데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5,31-39)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두 가지 빵의 기적에 대한 의미해석(16,9-12)으로 마무리 된다.


  복음이 전해주는 빵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다. 자신들의 평범한 이론과 습관들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예수님은 마치 평범한 일처럼, 그냥 우리가 늘 생각하고 행하는 패턴처럼 여기신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사가가 단순한 빵의 기적을 가지고 생명의 빵(성체성사신학)을 구상하거나(요한 6장),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21절)을 끌어들여 누구나 참여하는 미사성제를 마태오복음사가가 구상하든지 간에,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있는 것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채워 주실 것이다. 오늘은 빵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셨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죽음과 부활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실 것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빵의 모티브를 통하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서서히 예고하시려는 것이다.(마태 16,1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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