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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47 > 억지 휴가의 말로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08 조회수930 추천수7 반대(0) 신고


 

 

                          억지 휴가의 말로



   본당의 월동준비 공사로 사제관 수리가 있었는데 그 통에 강당에서 잠을 자다가 감기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에라, 잘됐다!“ 싶어 휴가를 선언하고 1주일 여행길에 올랐다.


   장거리 운전은 피곤해서 대전 고향길을 열차로 가는데 오랜만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우선 가방에서 읽을 책, 쓸 종이를 꺼내고는 느긋하게 앉아 있는데 웬 불독같이 생긴 50대 남자가 불쑥 닥아 와서는 “아저씨, 거긴 제 자립니다” 하는 것이었다.


   “몇 번 좌석입니까?” 나도 깜짝 놀라 차표를 확인하는데, 이친구 제 번지수도 모르면서 애매한 사람 분위기만 잡쳐놓고는 미안하단 말도없이 확 사라지는데, 기분이 별로였다. ‘아녀! 여행을 이런식으로 잡쳐선 안돼.’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늘 그러하시듯 하실 말씀이 많으셨다. 아버지가 여전히 헌금을 적게 하신다는 것이며,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않으시면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신다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또 어머니가 늙어가면서 건건이도 만들지 않고 그저 남편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만 걸어오니 당최 더 이상은 못 사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도 두 분이 50년 이상을 부부로 살아오신 것을 보면 이게 은총인지 팔자소관인지 신비롭게 여겨질 때가 있다.


   셋째 날엔, 목사가 되었다는 제자를 찾아보았다. 변두리의 작은 교회였는데, 근 30년 만의 일이라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섬마을로 발령받았을 때 그 목사가 12살 소년으로 반장이었는데 이제 마흔한 살의 중년 목사로 내 앞에 있는 것이 참 신기하게 여겨졌다.


   “선생님이 제자보다 더 젊으신 것 같아요”라는 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맥주 딱 한잔씩 나눴는데 “즈인 선생님의 신앙을 몬 잊어유” 하는 목사 제자의 말이 은근하게 나를 때렸다.


   원래 여행의 하일라이트는 춘천에다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수도생활에 대한 미련도 있었지만 나완 15년 지기의 친한 수사님이 거기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광주에 계실 땐, “신부님과 수사님은 떨어져 계셔야지 가까이 계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수도원의 주방 아줌마들이 술걱정을 해주시곤 했는데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달 동안 잘 막아논 둑에 술을 댓병으로 부어대니 안 터지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틀 동안 주해(酒害) 속에서 허덕이다 다시 대전을 거쳐 광주로 내려오고 보니 공연한 휴가를 억지로 가졌다가 술 때문에 성사감만 몽땅 짊어지고 온 것이 되어 본당에 들어설 때는 여간 부드러운 것이 아니었다. 순교자 성월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이상한 일도 생겼다. 소양강 댐에서 술 먹은 김에 젊은 비구니의 손을 잡아 보자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어 주던 그 모습과 이틀 동안 기사로 친절을 베풀어 주던 자매님의 다정한 모습으로 문득 삼삼하게 떠오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


   “하느님, 이건 소죈가요 대죈가요?”

http://my.catholic.or.kr/vegabond

 



          -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 중에서 / 강길웅 요한 신부(소록도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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