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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참된 믿음. 주님과 일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12 조회수582 추천수2 반대(0) 신고
 

“아, 믿음 없고 삐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단 말이냐?”


  예수님의 이 지적은 예수님께서 잠시 부재중에 일어난 소란에 대해 핀잔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령을 내쫒고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주시고 여러 지방에 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모두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돌아와 주님의 크신 능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과 산에 오르셔 거룩한 변모를 보여 주시고, 첫 번째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말하신 직후입니다.


  간질 발작하는 아이를 고쳐달라는 아이 아버지의 부탁에 제자들은 제대로 치유하지 못합니다. 난감한 상태에 빠진 제자들이 아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군중들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군중들과 그 아버지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단순히 치유의 기적을 베풀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으면 곤란합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시는 삐뚤어진 믿음은 바로 예수님과 일치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야하느냐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곧 떠나가실 예수께서 걱정되어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일치가 이루어진다면 비록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든 일에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을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올바로 알아듣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왜 교회에 다니느냐고 물으면 아직도 피상적으로 대답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다. 평화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다. 죄에 물든 이 몸을 용서 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언뜻 정답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이차적인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위험을 감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위안을 얻으려고 은총을 받거나 보호를 받는다는 막연한 기분, 보살핌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라 여깁니다.


  에리히 프롬은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고, 성숙한 사랑은 필요에 쫒기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풍요로움과 기쁨마저 넘어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믿음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심장함을 깨달은 자만 따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이해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를 비워합니다.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추호도 있어서는 일치가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은 요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굴복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맹목적인 굴복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상호 신뢰’와 ‘친밀함’ 이 곁들여져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시듯 우리도 그 신뢰와 친밀함이 믿음에 바탕이 되어야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다.” (마태 6,33)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하느님께 찬양을 올릴 수 있게 됩니다. 제 몸에 비록 불행이 닥치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고 그 요구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불가에서 말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법어도 사실은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마땅한데, 그 있는 사실이 내게 고마움으로, 은총으로 다가오는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 선사의 말 뒤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통해서 경험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배어 있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하는 말입니다. 그 삶 안에 굽이쳐 흐르는 고통과 슬픔, 환희와 기쁨, 즉 모든 苦를 부정하고 또 부정한 뒤에 오는 긍정의 표현인 것입니다.


  걸림 없는 마음은 바로 자아를 비운 마음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이며, 깨끗한 마음입니다. 그때에 하느님 나라는 우리 것이 되며,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마태 5,3.8)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파도 믿음이 투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 부르십니까? 잘못된 믿음은 오히려 이웃에게 무거운 멍에를 강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들이 맡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의 그릇된 행태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들은 선악의 기준을 자신들이 관장하는 줄로 알고 율법에 따라 남을 판정하였습니다. 그 점을 예수님께서 지적한 것입니다. 즉 주님과 일치하지 못하고 자신을 앞세운 셈입니다. 주님과 일치하지 못한 믿음은 헛것입니다. 어떤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일치할 때 주님의 멍에는 가볍습니다.(마태 11,30) 어떤 일도 다 이룰 수 있습니다.

  

  일치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쫒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없습니다. 믿음의 씨앗은 바로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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