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모 승천 대 축일. 서공석 신부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15 조회수634 추천수4 반대(0) 신고

성모 승천 대축일   2006년 8월 15일


루가 1, 39-56.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성모님도 그 생애의 종말에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승천은 우주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던 시대에 사용되던 낱말입니다. 과거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하늘, 우리가 사는 땅, 죽은 이들이 가는 지하 어둠의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모 승천 축일을 성모님이 그 생애 종말에 하느님에게 가셨다는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의 믿음을 기억하는 축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성모님도 죽음 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리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복음서들이 마리아에 대해 언급할 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어머니와 제자를 보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보십시오.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보시오. 그대의 어머니이오.”(19,26-27). 요한복음서는 이 말씀으로 초기 제자들이 마리아를 소중히 생각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된 일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운명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어머니가 지닌 삶의 자세를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 있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신앙인인 우리의 운명과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가서...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고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들은 성모님은 즉시 길을 떠나 역시 한 생명이 태어날 것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를 맞이한 엘리사벳은 말합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와 이웃 안에 숨 쉬고 있는 하느님의 생명이 태어나 자기의 삶 안에 나타날 것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 기다림은 기쁨이고 서로에게 하는 축복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는 본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예배에서 사용하던 것입니다. 이 노래는 구약성서 구절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그 노래를 채집하여 마리아가 한 노래로 오늘 복음에 담았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세 부리는 이와 부요한 이가 있고, 비천한 이와 굶주리는 이가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에 자기의 구원을 보는 사람은 자기 운명을 전혀 달리 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모든 차별을 철폐하신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표현한 것입니다.


루가복음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자, 마리아가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가 1,38)라는 말씀으로써 새 생명을 영접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을 자기 안에 영접하고, 그것이 자기 삶의 의미가 될 것을 기대하며 삽니다.


요한복음서 2장에는 가나 촌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 잔치에서 물을 술로 바꿀 것을 예수님에게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좋은 술을 공급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술 떨어진 잔치 집과 같이 따분한 유대교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희망을 두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라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복음서들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 신앙인의 운명을 새롭게 말할 필요가 있을 때, 성모님에 대해 말합니다. 19세기 유럽 지식인 사회를 강타한 합리주의는 하느님이 이 세상의 일에 개입하실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류역사 안에는 하느님의 계시도, 섭리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회는 이런 주장에 맞서서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교회는 1854년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에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승천 교리도 성모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영광을 누리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1950년 11월 1일에 선포된 축일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렀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이루어진 유럽 사회는 인간의 미움과 잔혹함이 만든 폐허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던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인명 살상(殺傷)과 문명 파괴의 위력을 높였습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힘을 합쳐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졌고 인류는 쓰레기와 같이 비하되었습니다.


이런 파멸의 폐허 위에서, 유럽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천명해야 했습니다. 인간의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축일은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도 인간 생명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살상을 시도하는 현장들은 있습니다. 각종 테러, 지속되는 전쟁들, 그리고 핵무기와 미사일의 개발 등이 있습니다. 현재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오염도 인류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 운명이 달라질 것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안에 살려서 살자는 노래입니다. 성모님이 하느님 안에서 그 생애의 종말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완성되는 삶을 살겠다는 노래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애를 완성시키신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그분의 자비를 배워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비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스며들면, 그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

 


01. Provance (프로방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