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오늘 복음묵상]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17 조회수62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8월 17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18,21-22)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마어마한 부채를 탕감받았음에도 자기에게 조금 빚진 동료에게 가혹하게 빚 독촉을 했던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용서를 권고하십니다

 

☆☆☆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일도, 우리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모두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청합시다.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박상대 신부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