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아떻게 자기 살을'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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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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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6-08-19 | 조회수625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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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기 살을> (요한 6, 52-59)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체험을 하였다. 사울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그리고 사울의 상식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의문의 질문을 한 것처럼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 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도저히 알아듣지를 못하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매우 당황스러워한다. 그 일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위기는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났을 때, 또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이나 말을 들었을 때 그 앞에서 절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다.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단절할 수도 있다.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말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영적 세계는 무한하다. 또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그래서 시인 괴테는 "사색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행복은, 탐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탐구하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을 조용히 우러러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구도자의 자세가 있다.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작은 머리로 다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기보다는 마리아가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듣지를 못했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52)고 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이 구도자의 자세이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자기들의 살을 먹으라고 남에게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유대인들은 한번도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놓은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삶을 살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오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던 사람들이었다. 바오로는 그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기의 신앙이었다. 그가 예수님의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자기의 신앙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세계 즉 자기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마스쿠수 사건을 통해 그 세계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 라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묵상하며 생활한다면 자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될 것이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알아듣지 못했던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이성의 세계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되리라. 그렇게 될 때만이 비로서 우리는 박해하던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되었듯이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신앙의 그 깊은 세계, 넓은 세계, 무한히 펼쳐지는 신비로운 세계를 볼 수 있으리라.
우리 자신이 남에게 먹히는 존재로 성장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해 봄부터 부지런한 농부의 수고와 땀방울이 필요로 하였듯이 그렇게 우리의 영성 생활을 위해 노력하는 자만이 남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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