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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망, 그것은 기다림 그리고 인내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22 조회수759 추천수8 반대(0) 신고
                     

             

                   희망, 그것은 기다림 그리고 인내



   얼마 전, 수희가 저의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날 아침 미사 시간에 제가 이곳으로 소임을 받아 온 것을 보고 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수희가 머무는 시설과 제가 근무하는 시설은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몸이 불편한 수희가 혼자서 워커에 의지하여 오기에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온 것입니다.


   저는 수희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두유를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컵을 구해다 부어 주고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직도 부자연스럽고 조금씩 흘리기는 하지만 혼자서 두유를 마시는 모습이 여전히 대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수희는 다 마시고 나서 제게 종이를 달라고 하더니, 비뚤지만 큼직한 글씨로 “호랑이 수녀님, 사랑해요” 이렇게 써서 저에게 주면서 수줍지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제가 수희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입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장애아들과 지내는 소임을 받게 되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지만 눈망울은 얼마나 맑고 예쁘던지….


   그 중에서도 수희는 대리석처럼 맑은 피부에 특히 맑고 검은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희는 기는 것조차 할 수가 없어서 누운 채로 왼쪽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왼발 뒤꿈치에 힘을 주어- 오른쪽은 왼쪽보다 마비가 더 심했습니다 - 온몸을 밀어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혹 마음이 급할 때에는 몸을 데굴데굴 굴려 원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뒤통수에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아 늘 맨질맨질했지요. 게다가 언어장애도 있어서 말을 하지 못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워, 워-”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렇듯 수희는 몸도 많이 불편한 데다 말도 못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태를 파악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 앉아서 빨래를 개고 있는데 옷을 하나하나 갤 때마다 수희가 “워, 워”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다른 아이들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무슨 불편한 일이 있나’ 하고 보았는데, 그 손짓은 다름 아니라 그 옷의 임자를 가리키는 것이었지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그때 저는 아이들과 옷에 익숙하지 않아 이름표를 보아야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는데 수희는 평소에 아이들이 입고 있던 옷을 다 기억하고 저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일 이후 저는 빨래를 갤 때마다 수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 옷은 누구 것이지?” 수희는 귀찮아하지도 않고 일일이 그 옷의 임자를 가리키며 제가 맞다고 인정할 때마다 즐거워하고 뿌듯해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수납장까지도 거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희가 말은 못하지만 이해력이 꽤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봉사자들이 물품을 정리할 때 수희에게 안내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언제나 성실히, 기쁘게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누운 채 밀고 다니거나 데굴데굴 굴러다니면서.


   수희가 제 말을 잘 따르고, 무엇인가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음을 알게 되어 새로운 시도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불러놓고 “수희야, 네가 누워서 움직이고, 또 굴러다니니까 머리에 머리카락이 안 나거든. 엎드려서 기는 연습을 해볼까? 그러면 머리카락도 잘 자랄 테고, 머리카락이 자라면 예쁜 핀도 사서 꽂아 줄게.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분명히 수희는 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수녀님하고 한번 연습해 볼까?” 했습니다. 수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힘든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엎드려서 거실을 한 번 가로질러 가는 데 30분이 걸렸습니다. 쉬고 또 쉬고… 그러나 온몸을 땀으로 적시면서도 수희는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고, 횟수를 조금씩 늘려갔습니다. 힘이 들어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기는 수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서 중간에 그만두게 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 욕심으로 아이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 힘든 과정을 거친들 수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꾀를 부릴라치면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결과, 1년이 지난 후에는 꽤 빠른 속도로 기어다닐 수 있게 되었고 머리카락도 자라 예쁜 머리핀도 꽂을 수 있게 되었으며 두 갈래로 묶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두유도 혼자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시다 흘려서 목까지 두유 마사지를 하기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는 중에 수희가 제게 붙여준 별명이 ‘호랑이 수녀님’입니다.


   어느 날 자원봉사자들이 농담삼아 “수희야, 여기 호랑이 수녀님 계시니?” 하고 물었더니, 전혀 망설임없이 여러 수녀님들 가운데서 저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칭찬인지 흉인지 분간이 안 되었지요, 그때는. 수희의 표정으로 보아 흉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리고 6개월 후 저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그곳을 떠났습니다. 


   수희와 떨어져 산 지 8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제 별명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기치 않게 사랑을 고백하여 저를 감동시키기까지 하다니요. 지난날의 그 안타까움과 대견함이 다시 생생하게 저의 마음에 살아옵니다. 수도 없이 걸레질을 하고 물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두유 마시는 훈련을 시키던 일, 엎드려 기는 연습을 하느라고 땀으로 범벅된 모습을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일, 예쁜 옷을 입혀놓고 사진을 찍어 주며 즐거워했던 일…. 장애아들과 지내는 동안 수희를 비롯한 장애아들의 안타까운 모습,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순간순간 하느님의 뜻을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그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때로는 그들로 인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비록 그것이 남들에게는 하찮은 모습일지라도 뛸 듯이 기뻤습니다.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에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했던 시간들이 지금까지도 제게 많은 용기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수희에게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거두지 않았기에, 또 수희의 부단한 노력과 땀이 있었기에 지금은 걸을 수도 있고 컴퓨터를 이용하여 공부를 하며 나름대로 꿈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언젠가 수희와 2시간 동안 함께 차를 탈 기회가 있어서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수희는 줄곧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쳤는데,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했는지, 또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로마 5,3~5).


“수희야,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힘내! 아자 아자, 파이팅!”

http://my.catholic.or.kr/vegabond


 

                       - 김영숙  제노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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