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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66) 바람 이야기 /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22 조회수693 추천수4 반대(0) 신고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육지에서 날아온 이방인을 맞이하였습니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골 공소에서 온 밤을 덜컹이며 불어대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강의 때문에 제주도에 자주 올 기회가 있었지만, 목적한 일만 끝나면 부랴부랴 서울로 돌아오느라 제주도에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제주도의 삶을 한번 느껴보고 싶어 그동안 벼르다가 이번에는 작정하고 내려온 탓인지, 새삼 저에게 첫 느낌으로 다가온 제주섬의 주인은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이었습니다.

 

눈이나 비와는 달리, 그 자체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상도 갖추지 못한 바람은 풀잎과 바다를 흔들어서 자기의 존재를 알립니다.

바람은 시시로 방향을 바꾸고 그 세기를 달리하여 자신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바람 돌개바람 산들바람.......  .

 

옛사람들은 바람에게 이런 이름을 불러주면서 농사일과 고기잡이를 위해 바람이 간직한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하늬바람이 불면 날씨가 맑아지고 고기떼가 모인다는 속설도 바람의 비밀을 읽어낸 뱃사람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창문을 덜컹이며 불어대는 제주도의 바람은 단순히 날씨에 대한 정보뿐 아니라 분명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만, 제주도에는 360 여개나 되는 '오름'이 있다고 합니다.

마을 뒷동산 정도로 생각되어 별로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오름은 제주도 마을 사람들의 토착신앙과 전설이 살아 있는 단성화산들이었습니다.

 

마치 섬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갑자기 식은 것처럼, 봉긋봉긋 솟아난 꼬마 화산들은 꼭대기에 크고 작은 분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오름 사진들을 보면 마치 어미새가 날라 주는 먹이를 기다리는 둥지 속의 어린 새들처럼 입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이 오름의 분화구는 쉴 새 없이 불어대는 제주섬의 바람이 잠시 내려앉아 유일하게 쉬어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제주도의 어느 작가는 오름을 두고 바람이 머물다 간다고 하여 '바람자리' 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올라본 바람자리는 관광지로 잘 알려진 '산굼부리'입니다.

마치 하늘의 거인이 내려와 빚어 놓은 듯 예쁜 동그라미 분화구가 놓인 오름입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올라와 정신없이 사진을 찍는 사이, 저는 두 팔을 벌리고 마치 한 그루 나무처럼 바람의 길목에 서서 억새풀밭을 휩쓸며 우수수 올라오는 바람을 느껴보았습니다.

비릿한 냄새를 싣고 오는 바닷가 바람보다 들판을 휘돌다 오름에 다다른 풀향 가득한 바람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철새의 이동경로를 연구하는 사람처럼 깃털보다 더 가벼운 탐지기를 한 점 바람에 꽂아두고 싶은 엉뚱한 설레임을 느꼈습니다.

때론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으로, 수레처럼 꽃향을 실어나르는 산들바람으로, 새근새근 잠자는 아가들의 호흡으로........

 

이렇게 시작도 끝도 없이 지구촌 곳곳을 떠도는 한 점 바람의 경로를 추적한다면 바람이 간직한 곳곳의 이야기를 알아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만이라도 꼭 제주도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바람의 사진가 김영갑 선생의 사진 작품을 만난 것은 제주도에 머문지 열흘이 훨씬 지난 후였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동창 신부의 서재를 뒤지다가 우연히 제주 동녘 증산간 들판을 바람을 쫓아 떠돌며 셔터를 눌러대던 한 사진가의 짧은 생애를 읽었습니다.

그날 곧바로 두 시간여 거리에 떨어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을 찾아 차를 달렸습니다.

 

폐교가 된 삼달리 초등학교를 빌려 꾸며놓은 갤러리에는 잘 지어진 여느 전시관 못지않게 은근한 품위와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사진에는 문외한이지만 저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순간을 포착해 낸 흔들리는 바람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대는 된바람,

억새밭을 서걱이며 지나가는 실바람,

보리밭을 일렁이는 납실바람...........

 

그의 사진 곳곳에서 출렁출렁 바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바람의 이야기는 사진보다 더 아름답게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삶의 흔적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50의 나이를 채 채우기도 전인 작년에 루게릭병으로 숨졌습니다.

"김영갑을 만들고 그의 사진을 만들고 그를 데려간 것은 바람" 이었노라고 그의  지인(知人)이 진술하듯, 바람은 한 청춘을 사로잡아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청년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낯선 섬을 홀로 떠도는 지독한 고독과 늘 빈 쌀독을 바라보아야 하는 진저리나는 가난을 살면서도, 바람결에 흐르는 대자연의 황홀한 한순간을 필름에 담기 위해 미친 듯 바람 부는 들판을 온종일 헤매었습니다.

 

그는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이어도,

베일에 가려진 저 황홀한  미(美 )의 세계를 바람에 펄럭이는 벌판에서 본 듯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카메라에는 담을 수 없는 그의 마음속의 풍경일지 모릅니다.

손바닥만한 카메라의 창을 내다보며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맨 그 아름다움의 세계는 치열한 삶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인생의 신비를 얼핏 깨달은 일별(一瞥)의 순간일 것입니다.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평화가 되고 구원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자전 에세이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건네주고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다운 삶을 여한 없이 보고 느꼈다. 이제 그 아름다움이 내 영혼을 평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한 지금,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시간이란 흐름은 벌판에 끊임없이 불어대는 바람입니다.

가슴을 설레며 손꼽아 기다리던 즐거운 여행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느덧 바람을 타고 아스라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한 순간이라도 우리가 붙잡아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산다는 것은 마치 바람 부는 인생의 들녘을 배회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의 사진을 찍는 것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보다 나은 한 컷의 사진을 담아내기 위해 시간의 흐름 속에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바람의 사진가가 필생 업으로 하여 찍은 사진은 족히 20만 컷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몇몇 사진만이 그의 갤러리에서 선보일 뿐이었습니다.

 

사제의 삶을 선택하고 지금껏 살아온 기억의 앨범들을 꺼내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언젠가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날,

아름다운 기억의 사진을 과연 몇 장이나 건져내어 전시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에 빠진, 그 황홀한 기억의 사진 한 장 간직할 수 있다면......  .

바람의 사진가가 되어 억새풀 출렁이는 삶의 들판을 서성이는 사제의 삶은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온밤을 덜컹이며 불어대던 제주도에서의 바람 이야기는 내 안에서 나를 두드리는

 

간절한 '바람' 이 되어 지금도 작은 돌개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ㅡ말씀지기 주간 : 전 원 신부님의 편집자 레터 전문(全文)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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