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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에게 질문하시는 하느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23 조회수692 추천수6 반대(0) 신고

   <욥기의 마지막 답변에서>

 

욥은 그동안  자기가 가져왔던 모든 의문이 일시에 풀리면서 하느님께 대답을 한다. 욥은 폭풍우(38장) 속에서 들려주는 야훼 하느님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자기의 마음을 풀지않았었다.  야훼 하느님을 만나 뵙게해달라고 줄기차게 외치던 그가 , 자신의 무죄함을 대변해 달라고 외치던 그가 정작 야훼 하느님을 만났지만 여전히 자기 고통에 대한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새롭게 하느님께서 던지는 질문 속에서 모든 의문이 저절로 풀렸다.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 이냐?

    네 팔이 하느님의 팔만큼 힘이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권세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너의 분노를 폭팔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보이거든 짓뭉개 주어라.

    거드럭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꺽어 버려라.

    불의한 자는 짓밟아 버려라.

    한꺼번에 땅속에 묻어 버려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알아 주리라.

    네가 자신의 힘으로 헤어날 수 있으리라고.(욥40,6-14.)

 

   그리고 심해에 살고있는' 베헤못과 레비아단 ' 이란 동물을 예로 드신다. 그러한 동물 들은 인간이 보기엔 아무 소용도 없으며 전혀 유익이 되지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공포와 해를 가져다 주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렇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의미를 누가 판정할 것이며 그 존재 가치를 그 누가 따질 것 인가? 인간 세상에 드러나는 선과 악을 감히 그 누가 무게 달 수 있을 것 인가? 네가 이 모든 일을 설명할수 있다면 , 네가 심판을 할 수 있다면, 그에따라 상벌을 내릴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알아 주고 심지어 너를  하느님이라고 인정해 주겠노라고  그분은 말씀하신다.

 

   이 물음에 욥의 혜안이 열리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에와와는 달리 욥의 믿음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자각 하는데 있었다. 사탄의 유혹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어 선악을 판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알았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 껄였습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 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1-6)

 

   욥의 이 대답은 자기가 전에는 하느님이 이러저러한 분이라는 것을 소문으로, 그냥 객관적으로  "그분" 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그 하느님을 나의  "당신" 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인 것이다. 여기서 사용된 yada 동사는 몸 전체로 체험하여 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욥에게 고통이 이제부터는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못한다. 띠끌과 잿더미에 그대로 앉아 있더라도 그것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며 오히려  뉘우침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음 자체가 하나의 큰 선물이며 하느님을 뵈올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당신께 항변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지켜봐 주신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오로지 할 일은 찬양 뿐인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보다 더 좋고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내 삶에 직접 참여하시어 나를 이끌고 계시니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인간은 누구도 하느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이스라엘의 야훼는 대화의 상대방이다.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에서부터 신과 함께 대화가 이루어지고 계약들이 이루어 진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체험인 출애굽 사건도 그 계약의 실천인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야훼 하느님을 부르짖음의 상대로 여기고 야훼께서 자신들의 신음을 들으신다고 확신하면서 봉헌의 제사를 바쳤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도 그의 로마서간에서  "나는 '그분의 소문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보여 주고 그분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 주리라.' 고 한 성서 말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로마,15,21.) 라고 적고 있다.

 

   20세기 유대교 랍비 마르틴 부버(1878-1965)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 3인칭으로 그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다. 그러나 그를 믿는다는 것이 그에게 직접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나는 신을 믿겠다." 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그분에게 말씀드리고 존재의 의문을 캐어 묻겠다는 뜻이다.

 

   19세기 덴마크 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  로 살아 갈 것을 요구 했다.

 

   우리는 "너 어디 있느냐?" (창세3,9)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 가야 한다.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다림 속에 살아 가야한다. 끈을 놓치지 말고 부여 잡으면서 살아 가야한다. 청종의 삶을 살아야한다.

 

    이  "당신-하느님"  으로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 해당되는 갖가지 속성 들이 이해된다. 이분이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당사자가 되신다. 그것도 짐승을 둘로 가르고 그 사이를 걷는 계약의 의식을 행하시면서. 이분은 약속의 심판관이고 살아 있으며, 거룩하고 의로운 복수자이고, 마침내는 그의 보편적인 의지를 통해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분은 세계의 주님이자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가까이 쳐다 볼 수 없으며 숨어 계시며, 인간들에게는 계시를 통해서만 도달 될 수 있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당신께서 약속하신 바를 신실히 지키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그분은 당신의 의로움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 하면서 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다.

 

    그분은 현존하는 야훼-하느님으로, 체험될 수 있는 하느님으로, 촉구하는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우리는 이에 응답을 해야한다. 그분을 선포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또 다른 당신인 이웃에게 봉사를 해야한다.

 

  Immanuel 이신 당신이여,

  이 몸이 듣사옵니다. 한 말씀 하소서.

  Amen.

 

 

♬ 쇼팽의 즉흥 환상곡 / Leonard Hoka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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