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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68) 어머니의 유산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25 조회수600 추천수6 반대(0) 신고

 

 

 

내 어머니는 올해 연세가 여든 둘이시다.

어머니는  심장병이 있으시다.

수년 전부터 여러번 쓰러져 119에 실려가셨는데 그때마다 용케도 살아나셨다.

작년에는 연거퍼 세 번이나 그러셨고, 금년 6월에도 쓰러지셨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셨다.

 

그런 어머니가 요즘 기대감으로 부풀어 계신다.

외할아버지의 유산이 어머니에게도 돌아오게 되어 있어서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40년 전에 이미 재산은 어머니의 친정 직계손들이 다 물려받았는데 난데없는 땅쪼가리가 어디엔가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땅값이 무지하게 많이 올라서 적지 않은 유산이라고 한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어머니는 당신 부친의 유산을 나누어 받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서류가 접수되어 금년 안으로 분배를 받게 되는데  모두 10명이 나누어 받게 된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살다가 참 별일도 다 있다고 하시며 그 유산을 받으려고 그렇게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나 보다고 하시며 기분은 마냥 좋아 보이신다.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큰 돈 만져보시게 되어 좋으시겠다고, 그 돈 다 어디에 쓰실거냐고 했더니 "자식들 하고 나눠써야지 나혼자 다 쓸 수 있니?"하신다.

졸지에 나에게도 외할아버지 덕에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떡고물이 떨어질 모양이다. ㅎㅎㅎ

 

내가 기억하는 외할아버지는 참 무뚝뚝하신 분이었다.

내 나이 열 세살 때 아버지가 외갓집 동네에 있는 학교로 전근가게 되어 그때 처음으로 외할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전쟁통에 외가로 피난을 가서 한동안 있었다고 하는데도 그땐 내가 너무 어려서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축음기로 동요를 들려주던 외삼촌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우리가 그곳으로 이사갔을 때는 이미 외삼촌도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새할머니와 재혼해서 살고 계셨다.

그곳에서 6,7년 살고 떠났는데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었다.

거의 말을 해 본 기억도 없다.

늘 화난 표정이었고 일꾼들에게 자주 소리를 지르는 그 어른에게 나도 정을 느끼지 못했다. 나역시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고 말이 없는 아이여서 한번도 외할아버지에게 다가간 적이 없었다.

 

우리가 수도권 근처로 이사오고 나서 3년쯤 후인가 이모의 연락을 받고 시내 다방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외할아버지는 서울 병원에서 위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냥 집으로 내려 가시는 길에 큰 딸인 우리 어머니를 만나려고 들렸던 것이다.

마침 장질부사를 앓고 난 후유증으로 미이라처럼 뼈만 남은 어머니를 부축하고 다방에 갔을 때, 어머니는 불치병에 걸린 부친에 대한 설움과 함께 당신도 죽을 고비를 넘긴 설움이 겹쳤던지 외할아버지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 같았다.

 

그때 난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눈에서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렇게도 냉담해보이기만 했던 어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면서 비로소 피붙이의 정과 아픔을 동시에 느끼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나보다 갸가 먼저 죽게 생겼어"

내려 가시면서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다고 한다.

그후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난 좀 더 나이를 먹고 나서야 외할아버지가 겪었던 아픔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갖 고생끝에 자수성가하여 갑부가 되었지만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땅을 잃는 시대적 아픔이 있었고 가정적으로는 외아들인 외삼촌이 서른한살 젊은 나이에 병사했고 다음  해엔 외할머니가 등성이 너머 연못에 빠져 자결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그곳에 이사갔을 때는 그런 일을 겪은 지 불과 삼사년 후였으니 무슨 낙으로 얼굴에 웃음을 지을 수가 있었겠는가.

 

재혼하시어 환갑날에 아들을 보았다고는 하지만 너무 상처가 컸던 탓인지 통 웃으시는 모습을 뵌 기억이 없었다.

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외할아버지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한번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을 참 후회스러워 했었다.

사실 그시절 나는 한참 사춘기로 고민도 많았고 책읽기에 빠져 어른들의 아픔이나 일에 대해서는 마음 쓸 겨를조차 없었다.

 

내 친할아버지는 내게 특별히 잘 해 준것 없어도 어린 시절 한집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육친의 정을 가졌으나 외할아버지에겐 아무런 정도 느끼지 못했던 나는 다방에서 그 어른을 마지막 뵌 후로 친할아버지와 똑같은 육친으로 마음에 다가왔었다.

 

친할아버지는 나를 잘먹고 잘 자라게 하여 주셨으니 특별한 유산이 없어도 더 소중한 가족의 울타리 역할로 어린 시절을 풍요롭게 해주셨다.

그런데 이제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유산이라는 떡고물을 남겨주시니 얼마나 소중한 육친인가!

 

어머니는 당신 친정동네에 사시는 동안 늘 외할아버지를 구두쇠라고 하셨다.

그렇게 많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도 일년에 달랑 쌀 한가마밖에 안준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널려있는 감나무와 밤나무에서 과일 실컷 따먹고 산에서는 청솔가지 꺾어다가 군불 때서 자식들 뜨시게 하고, 논두럭 밭두럭에 지천으로 쌓여 있는 볏짚 보릿단 마음대로 집어다 땠으니 어쨋거나 친정집 개기고 덕보고 살았다는 말씀을 가끔 하신다.

남의 집 것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부모 덕을 보고 사는게 자식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제 팔순이 넘은 딸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유산까지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외할아버지이신가.

 

부모 그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자식들은 잘 모른다.

사실은 물질적 유산만이 유산이 아닌 것이다.

보호받고 살아야 할 어린 시절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호막이 되어주는 부모의 은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호받고 산 사람들은 잘 깨닫지를 못한다.

그래서 늘 예전에 어땠느니 저땠느니 하면서 잘 못해준 것만 들추며 원망하기 일쑤다.

 

어른이 되면 저혼자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어렸을 적엔 보호자가 필요한 것이다.

외풍에서 보호해줘야 할 어른의 손길이 사랑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혹 그 손길이 조금 부실하였다고 해도 원망은 하지 말아야 한다.

 

친정어머니는 요즘 "나 그 돈 받기 전에 죽으면 안되는데" 하며 파안대소 하신다.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르는 심장발작을 염려하시는 것이다.

참 유산이 뭔지.......

유산이 기분좋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나도 괜히 덩달아 기분 좋다.

재벌들의 어마어마한 유산상속에 비하면 웃을 일이지만 그래도 팔순이 넘은 연세에 생각지도 않은 유산을 받는다는 자체가 조금은 들뜨게 하는 것이다.

큰동생이 그 돈 받으면 나누어 주지 말고 어머니 혼자 다 가지고 계시라 했다지만 우리 어머니가 그럴 분이 아니시다. ㅎㅎㅎ

 

사실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니 그게 더 좋을 뿐이다.

이미 어머니에게서는 받을만큼 다 받았으므로.....

낳아주고 먹여주고 길러주었으니, 온갖 세상의 위험에서 보호하여 주시고 어른이 되어 홀로 설 수 있게 해주신 것으로 유산은 다 받은 셈이니 무슨 유산이 더 필요하겠는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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