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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의 씨앗 주머니를 건네 주신 할머니 [정지풍 신부님]
작성자김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28 조회수957 추천수14 반대(0) 신고

 

 

 

 

 

 

제가 시골 본당에서 사목할 때입니다.

 

아나다시아 할머니로 부터

잊지 못할 영명 축일 선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 할머니는 저의 기억속에 종종 떠오르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는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할머니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나신 분입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혼자 사시던 73세 할머니였는데...

 

고향은 이북이며 오직 딸 하나 등에 업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 시골에 정착을 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그 딸을 애지중지 키워 시집을 보냈는데,

시집을 잘 못보내 마음에 늘 빚으로 남아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딸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을 늘 안타까와 했습니다.

 

원래 믿음이 강한 분이라 주일 미사를 한 번 빠지면 앓아 누울 정도로

괴로워하시는 분이었으며 청빈하고 결백한 분이셨습니다.

 

가끔 예고 없이 할머니의 집에 찾아가면 항상 밭에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당신 몸 하나 추스리기도 어려우실 텐데...

 

굽은 허리가 아프신지 일을 하시면서도 숨을 몰아 쉬곤 하셨습니다.

맨몸으로 타향에 사시던 터라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이장님의 도움으로 빈 집을 얻어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남이 쓰지 않고 버려둔 돌밭을 빌려 손수 일구어서

채마를 가꾸고, 과일을 길렀습니다.

얼마나 일을 많이 하셨는지 손가락은 휘어졌고,

할머니의 손을 잡으면 굳은 살이 박혀 있어 얼마나 거칠던지요.

할머니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실지는...

 

시골 성당의 신자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기 때문에

가을에 추수를 해야 교무금도 낼 수 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할머니에게도 교무금은 틀림없이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할머니를 미사 후에 사제관에 초대를 하여 식사를 함께 하며

은근히 여쭈었지요.

 

"할머니, 늘 밭에서 일하시지만 어려움이 많으시지요?

 어려운 살림에 헌금이나 교무금이 부담스럽지 않으세요?

 할머니는 저희 교회가 도와 드려야 하니 교무금은 안 내셔도 됩니다만

 혹시 그것이 부담스러우시다면 조금만 내시도록 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할머니는 펄쩍 뛰시는 것이었습니다.

교무금은 하느님께 드리는 몫이니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몇달 후 저의 영명 축일이 돌아왔습니다.

아침식사를 막 마쳤을때 사제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할머니였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반갑게 맞아들였지요.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는 호박 두 덩이가 망태기 속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신부님, 그동안 제가 허리가 아파서 장엘 가지 못했는데,

 죄송하지만 이 호박 두 덩이를 팔아서 그 돈을 교무금으로 처리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당신 밭에서 농사 지은 것 중 제일 좋고 큰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할머니의 표정에는 송구스러움이 가득 담겨있었고,

저는 할머니께서 너무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무금을 내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순진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 호박은 엄청나게 큰 호박이었습니다.

꼬부랑 허리를 하고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이렇게 큰 호박을

두 덩이나 메고 7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어떻게 걸어오셨을까?

 

잠시 차를 마시는 도중에 할머니는 뒤로 돌아서시더니

몸에서 무언가 찾고 계셨습니다.

허리에 동여맨 보자기를 풀어보이셨습니다.

 

거기에는 콜라 한 병과 담배 한 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영명 축일을 맞으신 신부님 선물이라며 건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집에 냉장고가 없어서 두레박에다 콜라를 담아 시원해지라고

 우물 속에 하루 왼종일 쟁여 놓은 것이에요.

 신부님,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러고는 신문지에 꽁꽁 쌌던 것을 풀어서

건네주시는 담배 한 갑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졌고...

할머니가 주고 가신 따끈따끈한 사랑에 취해서 뜨거워지는 가슴을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가신 후,

콜라를 한 잔 따라서 마셨습니다.

시원했던 콜라가 할머니의 사랑의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진 것을

마시면서 할머니가 건네 준 담배를 뜯었는데...

 

그 담배 개비들이 몽땅 반 쪽으로 동강이 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담배를 호주머니에 넣고 일을 하시는 중에 모두 동강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선물로 주신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사를 드리며

두 동강이 난 담배를 일일이 종이로 말았습니다.

그 담배를 피우면서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무한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할머니가 주신 사랑의 선물은

지금까지 사제생활을 하면서 받아 본 선물중에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고,

할머니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본당을 처음 맡은 저에게

사제생활의 좌표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씨앗 주머니를 건네주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저도 이러한 사랑을 신자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는 깨우침과

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에서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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