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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8 > “믿어도 될까요?”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8-30 조회수1,016 추천수10 반대(0) 신고

 

 

 

                        “믿어도 될까요?”



   언젠가 서울에서 제자의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할 때의 일이었다. 내가 술을 끊었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온 그 제자가 자꾸만 나와 자기 남편의 눈치를 살피더니만 드디어 포문을 열기 시작 했다.


   “신부님, 술 드시고 싶으시죠?”

   내가 그 제자의 눈을 쳐다 보면서 빙그레 웃자 그녀가 다시 돌려 쳤다.

   “잡숫고 싶으시니까  대답 안 하시는 거 봐! 드시고 싶으시죠?”

   그녀는 나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면서 다시 물었다.

   “신부님, 정말로 술 끊으셨어요? 거짓말이죠?”

   내가 역시 대답을 안하고 이번엔 그 남편 쪽을 보자 제자가 계속 다그쳤다.

   “정말 그동안 안 드셨어요?”

   그래도 내가 대답을 안 하자 그녀가 체념한 듯이 말했다.

   “드세요! 그렇게 드시고 싶으신 것을 어떻게 끊으시겠어요!"

   “.........”


   그 날 나는 정말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나는 술에 대한 전과(?)가 많은 사람이다. 이제는 아무리 술을 끊었다 해도 사람들이 잘 믿어 주지도 않으며 또 들어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주정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주정뱅이 기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신학교의 진학을 포기당한 중3 때부터 술을 마셨으며 처음부터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셨다. 그리고 사범학교 3학년 때는 술 때문에 무기정학을 당한 적이 있으며 선생이 되어서는 자주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


   처음 발령은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에 있는 ‘대난지도’라는 작은 섬의 분교로 지원을 했는데 나는 처음부터 섬 청년들과 ‘주붕회(酒朋會)’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했었다. 그때 술을 빨리 취하는, 이른바 속도전을 펴곤 했는데, 그때 나 때문에 간 다치고 위 다친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정작으로 음주 속도전에 모범을 보였던 나 자신만은 신체에 아무 이상이 없이 더 건강하기만 했다. 나는 사실 그런 면에서도 어쩌면 용서받기 힘든 죄인이요 악질이었다.


   음주 습관이 잘못 발전되다 보니, 술을 마셨다 하면 의식을 항상 잃었고 내가 취중에 한 행동을 잘 몰랐다. 그러니까 자연히 불안한 증세가 나타났고 그 때문에 마셨다 하면 더 마시곤 했다. 가금 끊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는 본래 술 체질이다. 마셨다 하면 이상하게도 뒷날 얼굴빛이 더 좋아지며, 취했다 하면 오히려 첫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를 더 일찍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술 체질이 아니다. 적당히 마실 줄을 모르며 기어이 목구멍까지 술이 꽉 차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넷에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한 2년 끊기도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마셨으며, 신부가 되고 나서도 주체를 하지 못할 정도로 자주 마시다가 나이 마흔여덟에 다시 끊었을 때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 했었다. 그때는 정말 조금도 술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그런데 사람은 역시 사람이었다!


   사제 안식년에 한 1년 미국에 머물다가 귀국할 때는 교포신자들이 날 붙잡고 놓아 주질 읺았다. 교포들과 같이 미국에서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사정이 아니어서 귀국하는데 그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송별회 때 딱 한 잔 마신 것이 다시 천 잔이 부족할 정도로 둑이 무너지게 되었다. 술 끊은지 만 3년 만의 일인데 언제나 그 ‘한 잔’ 이 꼭 문제였다.


   귀국해서도 나는 계속 술을 마셨다. 그렇다고 늘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 마시면 어김없이 속도전에다 짬뽕(혼주)으로 마시니 그 취함의 속도가 굉장히 빨랐고 또 일찍 다운이 되곤 했다. 나는 일찍 취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취하지 않을 땐 마음이 왠지 불안하고 허전했다.


   본당 사목회를 할 때는 임원들과 가끔 식사를 함께 했는데 식사 때는 으레 술이 나왔고 식사가 끝난 뒤에는 여자 임원들만 데리고 2차로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 아마 취하지 않았다면 감히 ‘노래방’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좌우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흔들어 대다가 내 손에 잡히지 않은(?)여자가 없었다.


   한번은 어떤 형제가 나에게 눈을 부라리며 “신부님, 정말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하며 언성을 높이기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랬다.  ”신부님, 제 마누라도 노래방에 데리고 가서 손 좀 한 번 잡아주세요!“ 이것은 정말 의외였다. 갑자기 기가 솟구친 내가 그랬다. ”팁만 주거라.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이라도 데리고 가겠다.“


   소록도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지난 4월부터 환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부터는 일이 좀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특히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는 사실 어쩔 수가 없었다.(‘어쩔 수 없다’는 말은 술꾼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전매특허 용어이다.)


   손가락도 없는 환우 할머니들이 반찬을 장만하여 상을 걸게 차리고는 기어이 맥주병을 펑 따서는 ‘이것은 술이 아니라 음료수니까 제발, 제술 한 잔만 받으시라’고 성화를 대신다. 그래서 드디어 발동이 걸리면 맥주가 아니라 소주를 두 병은 마셔야 직성이 풀린다.


   자기 의지로는 술을 끊지 못한다. 알코올 중독자는 신앙으로도 끊지 못한다. 끊으려 하면 오히려 없던 술이 공짜로 더 생기고 또 입에 쩍 달라붙는 술의 그 감칠맛이 사람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그러니까 자꾸 술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이번엔 왠지 겨우 한 달 만에 탁 끊어졌는데,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마는 내가 생각해도 내가 다 신통할 때가 있다.


   ‘예수님, 이거 믿어도 됩니까?“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소록도에서온 편지)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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