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4) 어느 초부터 먼저 끌까요? / 임문철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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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정자 | 작성일2006-08-30 | 조회수746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미사가 끝나고 복사 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신부님, 초를 왼쪽부터 꺼야 해요, 오른쪽부터 꺼야 해요?" "어떡하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복사 아이는 신부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을 짓더니 수녀님께 달려갔다. 원하던 답을 얻은 듯 당당히 제대로 향하는 복사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다가 이젠 내가 심각해졌다. 나 역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세 번씩이나 단식을 하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고, 안식일이면 집안에서 빵 굽는 일조차 하지 않고 종일 거룩하게 지내도록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주역이 되는가?
살아갈수록 내 모든 것이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는다. 내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듯 내 생명 자체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강과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주변의 은인들,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 . 하느님 나라도 내 노력과 업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데, 율법주의자들은 은총의 세계를 체험하지 못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노력과 업적에서 비롯된다는 교의의 덫에 빠져있다.
교우들에게 "그렇게 하는데 당신 기도를 들어주실 것 같으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나에게서도 바리사이의 교의가 득세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언제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나는 별 고민 없이 '남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었을 때' 라고 답한 적이 있다.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례를 베풀면서도 몇 명인지 숫자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새롭게 되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숫자들을 주워 모아 내가 유능한 신부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반면에, 요가다 단전호흡이다 하며 뉴 에이지에 빠져드는 교우들에게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겨우 "운동으로만 하고 너무 빠지지는 마세요." 하고 마는 내 자신을 보며 자괴감에 빠진다.
다 컸다고 부모 말도 안 듣고 성당도 안 나오는 자녀문제를 상담하러 온 이들에게 "다 때가 있는 거예요. 기도하세요." 하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에 화가 난다. 이렇게 나는 내 노력과 업적에 내 가치를 두는 현대판 바라사이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하느님은 나의 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심을!
마지막 날 주님을 뵙게 될 때 주님께서
"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고 물으시지 않고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실 것이다.
그때 나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씀드릴 수 있도록 살고 싶다.
<글 : 제주 중앙주교좌성당 임문철 주임신부님>
ㅡ 출처 : 가톨릭 다이제스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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