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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느 신부님의 가르침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1 조회수1,518 추천수9 반대(0) 신고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마태 25,13.4.10)



  열 처녀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그 당시에 있었던 혼인 잔치 장면을 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J. 예레미아스에 의하면 1906년경 그 부친이 팔레스타인 지방의 혼인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혼인이 밤에 시작되었는데 먼저 신랑과 그 집안 대표가 신부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신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신부 집의 대표를 만납니다. 그때 신부 집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위한 횃불을 준비한 여자들이 함께 왔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립니다. 두 집안 대표들은 적당한 곳에서 만나 혼례절차를 의논하고, 지참금을 알아보고, 신부의 친척들에 줄 선물을 합의하고, 또 혹시 있을 이혼이나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결별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 자리에서 합의금을 결정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종종 만족할 만한 합의가 늦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고성이 오갈 수도 있었습니다.  횃불 행렬대는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신부 집에서는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합의가 다 끝나면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하고 기쁜 소식을 외쳤다고 합니다. 햇불 행렬에 맟추어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신부 집으로 들어 갔다고 합니다. 자정 무렵에 신부 집에서 한차례 잔치를 연 다음 다시 신랑 집에 모두 몰려가 본격적으로 혼인 잔치를 거행했습니다. 그 잔치는 일주일동안 계속해서 열렸다고 합니다.


  위의 혼인잔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복음서에서 말하는 대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횃불을 든 행렬대 처녀들은 낮에 힘들게 잔치 준비를 했다가 나왔고, 하릴없이 여러 시간 기다리고 있었으니 지쳐 잠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준비성 없는 처녀는 기름이 넉넉히 있는지 확인도 안 해보고 그냥 들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랑 일행이 도착 했을 때 집까지 불 밝히고 잔치를 흥겹게 해야 되는 역할을 맡은 행렬대가 불 꺼진 채 걸어온다고 상상하면 아찔합니다.  누구라도 남의 잔치에 찬물 끼얻는다고 책망했을 겁니다. 잔치에서 쫓겨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드셨을 때 청중들은 누구나 머리를 끄덕였을 겁니다. 굳이 어려운 우의적 이야기로 이해하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 그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혀를 쯧쯔하고 찼을 겁니다. 잔치에 알맞은 처신을 못한 처녀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과 현상에 대해 궁금해 왔습니다. 갖은 머리를 짜내 알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자연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게 됐습니다. 그것을 자연과학이라고 부릅니다. 마치 분명히 아는 것처럼 들리지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모든 자연 과학은 어떤 가정아래 전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발견은 모두 어떤 이론을 가정하고 실험해서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주의 수많은 것들은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우리 인생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인간이 창조된 때부터 지금까지 궁극적 이해는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이며 예수님과 한 형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마지막 구원의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오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모른다.”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은 우리가 콘트롤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손에 달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욥기에서 욥이 최종적으로 하느님께 무릎 꿇게 된 이유는 자기가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입니다. 인간에게는 괴물처럼 보이는 브헤못과 레비아탄 마저도 그대로 선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입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너에게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 42,2-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당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고자하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애당초 불가한 일입니다. 이 깨달음을 안 욥은 이제는 잿더미에 앉아 있더라도 자기가 얼마나 큰 은총을 받았는지 알게 되었고, 오히려 감사의 찬양을 드려야 마땅하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욥기에서 42,7-17절의 종결문 부분은 사족으로 없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잿더미에 계속 앉아 있기를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기쁨인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는데 그 나머지에 무슨 미련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깨달음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장애인으로 태어났더라도, 내가 몹쓸 병에 걸렸고 모든 영예와 재산을 다 잃었더라도 그 태어남이 은총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욥입니다.


  깨어 준비하는 자세는 모든 것이 그대로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도 “보시니 좋더라” 하셨는데 우리가 무슨 말을 덧붙이겠습니까?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읊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아침에 진리를 들었더라도 저녁이면 잊고 나서 딴 짓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 기쁨을 잊고 나서 주님께 떨어져 나간다면 불행입니다.


  “인간이란 원래 기다리는 존재이다.”, “주시던 말든 그분 뜻이다.”, “이 대로 감사할 뿐이다.” 어느 신앙 깊으신 신부님께서 욥기를 강의하시면서 주신 가르침입니다. 부족하나마 저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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