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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 > “예수님, 뭔 일이라요?"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4 조회수966 추천수12 반대(0) 신고

 

 

                    “예수님, 뭔 일이라요?"



   어떤 본당에 피정,강론하러 갔다가 성당 마당에서 신자들과 잠시 환담을 나눌 때의 일이었다. 웬 작달막한 자매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두리번거리는 듯 하더니 갑자기 안면을 돌리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강길웅 신부님이 누구여?”


   남자라고는 그 자리에 나 혼자였고 게다가 난 사제 복장을 단정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그녀는 시침을 둑 떼고 딴전을 부리듯이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이분이 셔!”


   한 자매가 나를 가리키며 순진하게 대답하자 그녀는 어디 한번 심사를 해 보겠다는 듯이 눈을 이쪽 저쪽으로 뜨면서 내 키를 재 보더니만 고개를 흔들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생각보다 쪼깐하구만!”


   보자보자 하고 듣자듣자 하니 참으로 기찰 여자였다. 나이래야 서른다섯에서 이쪽저쪽 일텐데 숫제 반말 비슷하게 낮추면서 사람을 깔아 뭉개는 듯이 자존심을 건드리는데 이건 애교도 뭐도 아니고 일종의 시비요 선전포고였다.


   “하이고오! 자기는 어떻고...!”


   나도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응수를 하며 대들었으나, 우리는 금방 악수하며 친해지게 되었다. 살다 보니 별 여자가 다 있었다. 진짜 조깐한 여자가 얼마나 당찬지 입만 가지고도 남자를 여럿 잡아먹고도(?) 남을 여자였다! 어쨌거나 나는 키 때문에 가끔 당한다(?).


   언젠가 수녀님들과 가정방문을 할 때의 일이었다. 어떤 자매가 앨범을 꺼내며 전에 계셨던 수녀님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 주기에 나는 무심코 ‘그때는 수녀님들이 예쁘기도 하셨구나!“  하면서 복 없는 내 신세를 은근히 한탄했더니, 원장 수녀님이 갑자기 도끼눈을 뜨더니만 어디 보자는 식으로 입을 비쭉거렸다.


   드디어 수녀님이 자매의 앨범을 빼앗아 여기저기 뒤적이더니만 드디어 그 자매의 영세 사진을 찾아냈다. 그리고 날보고 들으라는 듯이 기어이 한마디 하셨다. “그때 신부님은 키도 참 크셨구나. 남자는 그저 키가 커야 해!“ 사진에선 신부님이 앉아 계셨는데도 수녀님은 그렇게 탄성을 질렀다. 일종의 복수요 앙갚음이었다.


   왜 또 그 대목에서 ‘키’ 얘기가 나오는지, 숫제 딴전을 피우며 고소하다는 표정의 원장 수녀님을 볼 때 머리에 얼핏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그 수녀님은 키만 작을 뿐만 아니라 배까지 나온 뚱뚱이였다. 그래서 뭐라고 한마디 더 할까 하다가 참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 때문에 그냥 입 다물고 말았다. 사실, 수녀님들 비위를 건드려서 이득이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좌우간 난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았다. 아버지는 크셨지만 어머니가 작으셨던 탓으로 일곱 자녀 중에서 아버지의 키를 넘는 자식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작았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키가 161센티미터였는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으로 나갈 때는 162센티미터 밖에 되질 않았다. 4년 동안에 겨우 1센티미터 컷기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볼 대마다 ‘키가 졸아 든다“라고 농담들을 했는데 사실이 그랬다. 그들은 부쩍부쩍 크고 있었고 나는 올 스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내가 점점 작게 보였던 것이다.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한때는 ‘신장기’ 라는 것이 있었다. 신문광고에 의하면 6개월에 5~10센티미터씩 큰다고 해서 그 말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는지 모른다. 1960년대 초의 일이었다. 나도 봉급을 타고 있었기에 당장 사고 싶었지만 워낙 빚이 많았던 형편이라 감히 부모님께 말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선생을 한다고 해도 자취 쌀값만 빼고는 부모님께 다 드렸기 때문에 나는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값은 불과 천이백 원이었는데 사실 어머니도 그 돈을 어디서 빼낼 재간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어려웠었다. 1962년도에 발령을 받아 섬마을 선생을 하면서 한 달 용돈이 단돈 백 원이었으며 십 년 동안 양복 한 번 입어 본 일이 없었다. 시계도 1969년도에 가서야 중고 시계를 월부로 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 얘기처럼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때의 신장기는 말 그대로 광고뿐이었다. 그래도 젊었던 내 가슴엔 천추의 한이 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짜리 몽땅!”


   이젠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도 누가 ‘키’ 얘기를 하면 자존심부터 상하면서 오장이 뒤집혀질 때가 있다. 그리고 엊그제 운동구점에서 슬그머니 키를 재 보았더니 아무리 용을 써도 161센티미터에도 미달 이었다! 키가 정말 졸아들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별일이었다. (R)


 “예수님, 먼 일이라요?”

 http://my.catholic.or.kr/vegabond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中에서/강길웅 요한 신부(소록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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