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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회 자신이 언제나 복음화 되어야 한다.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6 조회수736 추천수2 반대(0) 신고

      현대의 복음 선교

- 교황 바오로 6세 교황문헌 간략 요약 -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성 루가는 자기의 복음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이보다 앞서서 이사야의 예언을 당신 자신에게 맞추어 말씀하신 바가 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이 말씀을 위에서 말한 복음서의 말씀과 합하여 생각해 볼 때 그 완전한 뜻을 이해할 수 있다.

 

교회는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사명을 진 교회로서 파견되었다. 영광의 주님은 성부께로 돌아가셨지만

교회는 지상에 남아 있으면서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불분명하면서도 명백한 표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교회는 그 표징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교회는 복음 선포자이지만 교회 자체가 복음화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생활과 친교가 가능한 희망의 공동체,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라면 그러한 공동체는

믿고 바라야 할 것 사랑의 새 계명을 계속 들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백성은 세속 사회 속에 살면서 때때로 우상의 유혹을 받고 있기에 주님께 복귀하고 주님께 다시 불리어 하나로 뭉치게 해주는 “하느님의 크신 일들”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복음 선교에 있어 교회로서 참신한 활력과 힘을 보유하려면 교회 자신이 언제나 복음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르겠다. 비록 선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하더라도 확실히 사람들은 이런 정도에서

탈선한 것이다. 이같은 분리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는 복음서의 선언으로 명백해진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당신들을 배척하는 사람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

  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곧 나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고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셨습니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 더욱 넓은 지역에서 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상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 양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데 있다고 하겠다.

 

복음 선교는 제일 먼저 단순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령 안에 계시된 하느님을 증거 또는 하느님께서 성자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셨고 사람이 되신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고, 사람을 영원한 생명에로 불러주셨다 것을 증거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이 누구인지 이름조차 모르고 경배할 줄도 모르는 그러한 신,  이름 없이 멀리 있는 어떤 능력처럼 창조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것은 훌륭한 복음 선교

가 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실상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 안에 서로 형제이다.

 

기쁜 소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복음 선교는 역시 기초, 중심, 활동력의 절정으로서 명백한 선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사람이 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이에게 베푸셨다는 선언이다.

 

복음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새로운 약속과 희망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 복음의 중추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

사람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고, 용서하고, 희생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랑, 악의 신비, 선행의 추구, 그 밖에 긴급한 것으로는 기도, 경배와 감사, 하느님과의 만남의 가견적 표지인 교회와의 친교를 통해서 하느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들을 가르쳐야 한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 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한다.

본인은 최근 평신도들의 집회에서 “현대인은 스승의 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 스승의 말을 듣는다면 스승이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하고 말한 적이 있다.

 

사도 베드로께서도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의 훌륭한 모습을 표현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동을 보고 믿게 되는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은 말과 행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충실, 청빈과 희생, 현세 권력에 굴하지 않는 자유, 한마디로 성덕 생활의 표양으로 세상을 복음화할 수 있다.

 

복음 선교의 다른 방법의 하나로서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교리 교육이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등한해서 안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밖에 주목해야 할 것은 많은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게 헌신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화의 역할은 신자들이 수동적으로 성사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신자 각 사람이 신앙의 성사로써 성사를 생활화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즉, 성사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로 옮겨놓을 수 있는 성사가 되어야 하겠다.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신들의 입장을 내적 종교나 인격의 자주성 또는 인격에 대한 신뢰라는 미명하에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한쪽에는 무신론자와 무신앙자들에게서 또 다른 편에서는 냉담한 신자들한테서 복음 선교에 대한 저항을 상당히 받고 있다.

 

무신론자와 무신앙자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신앙을 거부하는 형태로 저항한다. 그들은 사물의 새로운 질서, 우주의 생명과 역사의 새로운 의미를 파악할 능력이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절대자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냉담자들은 그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또 그들은 스스로 잘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고, 그리고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 고유의 어떤 적개심을 가지고 저항하고 있다. 


무신론적 세속주의와 신앙 실천의 결핍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그리고 선발된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또 일반 대중이나 모든 사회 문화의 영역, 젊은 교회나 노쇠한 교회 등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교회의 선교 활동은 이 두 개의 세계를 무시할 수도, 중시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계시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그들에게 제시 또는 재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충분한 말과 방법을 계속해서 탐구해야 하겠다

 

성령의 작용 없이는 복음 선교는 불가능하다. 나자렛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 위에 성령이 내려오시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성부의 말씀이 들려왔다. 이때에 성령은 외면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의 선택과 그 사명을 표시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의 시련을 당하러 가셨다.“성령의 능력”에 의해 예수님은 갈릴래아로 돌아오시어 나자렛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성서의 이 대목은 오늘 여러분이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성령을 받으시오”하고 말씀하셨다.

 

복음 선교 활동의 주동은 성령이시라고 할 수 있다. 복음 선교를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주시는 분도 그분이고, 사람의 깊은 양심 속에서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께서는 복음 선교의 목적이고 종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새로운 인류를 일으키시고 복음을 전해주신다. 복음 선교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필연적으로 바라는 다양성에 대하여 일치를 도모케 하시는 것도 성령이시다. 성령을 통해서 복음은 세계 속에 지속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증표이며 시대의 표지가 되기에 복음 선교는 이 표지에 의해서 인간 생활을 비추어준다.

 

복음 선교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현대인들은 진정한 것에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가짜나 거짓을 싫어하고 진실과 정직을 찾고 있다.

 

만일 복음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선교의 효과는 매우 감소될 것이다.

틀림없이 이것이 오늘의 복음 선교에 있어서 크나큰 병이 아니겠는가?

 

우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복음이 교리상의 논쟁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간의 극한적 의견의 대립이나

상호 불목으로 상처를 입는다면 어찌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혼란되지 않겠으며

오류와 악한 표양을 받지 않겠는가?

 

복음 선교자들은 그리스도론이나 교회론에, 사회관이나 제도면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하는 것처럼

복음 선교자들이 대립하거나 불목해서는 안되겠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분열은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전하여야 할 가장 성스러운 사명에 손해를 끼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

그 때문에 성년을 공포하게 될 때 본인은 전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이신 하느님 화해하는 데

 먼저 신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해방자로서 인정하고,

 사랑과 진리의 성령 안에 사람들을 일치시켜 주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에

 깊은 일치가 회복되지 않으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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