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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옥체험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09 조회수990 추천수15 반대(0) 신고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마르코 7장 31-37절


“열려라!”



<연옥체험>


“열려라!”라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오래전 초창기 유학 시절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야심만만하게 비행기를 탔을 때만 해도 꿈도 많았습니다.


약간은 고생도 되고, 약간은 향수에도 젖겠지만, 그래도 고색창연한 서구 전통과 문화들이 살아있는 유럽에서의 낭만적인 생활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신앙의 본산에서 신학도 제대로 배우고, 가끔 성지도 순례하고, 고독도 씹으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저 밖에 없는 한 공동체에 도착하고 나서 한 이삼일 동안은 그럭저럭 견딜 만 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인지 회원들이 이것 저 것 물어보면서 관심도 가져주었습니다. 저 역시 손짓발짓을 동원한 가장 기초적인 회화를 통해서나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 대화를 진척시킬 수 없었습니다.


즉시 끔찍한 연옥체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을 걸어오면 겁부터 덜컥 났습니다.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니 그냥 실실 웃기만 했습니다.


기본적인 대화가 안 되니 사람들도 답답해하고, 나중에는 아예 무시하는 듯 했습니다. 자꾸만 제 안에 갇히기 시작했습니다. 밥 먹으러 내려가기도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나쁜○들로 보였습니다. 정말 괴롭더군요.


한국에서 사목활동 할 때는 나름대로 어깨 힘주며 살았는데, 거기서는 완전히 애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애물단지도 그런 애물단지가 없었습니다. 정말 자존심이 엄청 상하더군요. 하느님께서 제대로 된 바닥체험을 시켜주셨습니다.


그토록 지옥 같던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빠르게 ‘지껄이던’ 형제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나마 뭔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면서 언어 공부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지옥 같던’ 순간도 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들리기 시작하니 조금씩 말도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대화 역시 대화다운 대화로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이나마 의사소통이 시작되면서 제대로 된 외국인친구도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그 나라 문화도 이해하고 되고, 여행도 재미있어 졌습니다.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인다, 이제야 조금 살 맛 난다’는 느낌이 들면서 얼굴빛도 달라졌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로 향한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인간의 뜻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 영성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과의 제대로 된 대화도 가능합니다. 그제야 신앙생활의 참 맛도 알게 됩니다. 신앙도 성장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귀가 활짝 열리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보다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만나시고, 막혔던 그의 귀를 열어주시고, 묶여있던 그의 혀를 풀어주십니다.    


“에파타!(열려라)” 라는 주님의 외침은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유효한 말씀입니다. 사는 게 바빠서 하느님의 말씀에 전혀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철저한 귀머거리인 우리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 ‘에파타’입니다.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외침이 ‘에파타’입니다.   


우리가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지난 세월은 원망과 회한의 나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호 속에 이어져온 은총의 세월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음성이 ‘에파타’입니다.

   

오늘 비록 고통스러워도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자 가장 은혜로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달으라는 주님의 권고가 ‘에파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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