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한 가운데 세우셨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1 조회수594 추천수4 반대(0) 신고

 

<한 가운데 세우셨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루가 6,6-11)


  저희 명일동 본당 주일 9시 학생미사에 오시면 특별한 점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신부님께서 강론하시거나, 거룩한 성찬의 전례 중이라도 불현듯 고성이 납니다. 처음 이 미사에 참례하는 분들은 깜짝 놀랍니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그 소리는 바로 ‘파란마음 장애인 주일학교’ 학생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입니다.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거룩해야 될 미사시간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우면 분심이 생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심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그 고함소리는 J 라는 여자아이가 내는 것인데 그 아이가 지금 매우 기분이 좋다는 뜻이거든요. 그 아이는 언짢거나 우울할 때는 오히려 조용하고 특별히 기쁘거나 신부님께서 칭찬이라도 하시면 고성을 지른다는 것을 우리 본당 교우는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우리를 대표해서 주님께 찬미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장애 학생들도 그 소리에 화답해서 펄쩍펄쩍 뛰면서 같이 고성과 노래를 부릅니다. 물론 가끔은 저희도 깜짝 놀랄 때도 있죠. 그렇지만 우려할 만큼 분심은 생기지 않습니다. 일부러 이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이 제대 앞에서 보여주는 율동도 모든 교우들이 따라 합니다. 장애 학생이 분명치 못한 발음으로 독서와 신자들의 기도를 해도 다들 잘 알아서 새겨 듣습니다.


  저희 본당이 1995년 한국 천주교 교회에서 처음으로 장애인 주일학교를 만들어 일반 학생들과 장애아들이 미사를 함께 봉헌해 왔습니다. 인근에 주몽학교라는 장애인 학교가 있습니다. 그 가족들 중 천주교 교우가 많았고 그래도 여건이 허락하는 장애아를 둔 학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미사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박은종 사도 요한 보좌신부님께서 처음 파란마음학교를 세우셨습니다. 그때는 본당이 콘센트 막사로 지은 임시건물이었기에 천장이 낮아서 소음이 매우 심했었습니다. 오죽하면 교우들이 신부님 강론이 제대로 안 들리고 성찬의 전례 때 분심드니 운영을 그만두자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깟 어려움쯤은 견뎌보자는 여러 신부님들의 확고한 신념 덕분에 이제는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 후로 저희 본당을 본받아 명동본당을 비롯하여 서울 대교구에서와 다른 교구에까지 장애우 주일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파란마음 학교에 출석하는 장애인 학생이 28명쯤 되는데 실제 우리 본당 구역 학생은 8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어도 우리 본당으로 나오는 학생들하며, 처음부터 소문을 듣고 부모 손에 이끌려 찾아온 학생들 때문입니다. 안산에서 두 시간 넘게 걸려 혼자 찾아오는 학생도 있습니다. 나이도 다양합니다. 유치부부터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은 40대 중반까지 있습니다.


  이들을 돌보는 파란마음 교사들은 정말 고생이 심합니다. 주로 정신지체아인 학생들인지라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교사들이 깜짝 놀라는 일이 많습니다. 미혼인 여교사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 생채기를 내는 일도 있고, 소풍가서 연못에 노는 잉어를 잡겠다고 풍덩 뛰어드는 행동도 서슴지 않고 합니다. 한 학생에게 교사가 한 명씩 따라다녀야 제대로 교육도 하고 보호할 수 있습니다. 캠프라도 갈라치면 교사와 봉사자가 학생보다 두 배는 따라가야 제대로 운영된답니다. 그러나 봉사자들은 한결같이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보람되고 오히려 얻는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끈끈한 정이 느껴집니다. 덕분에 저희 본당 청년들 모임이 다른 곳보다 잘된다는 칭찬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사명감 없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이 마비된 사람을 회당 가운데 서게 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장애우들은 항상 주변에서 소외되고 감추어진 채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데 그 당시는 여북했겠습니까? 집안에서 숨어서 살았거나 걸인처럼 지냈겠죠. 그런 사람을 이제 회당 한 가운데다 세우신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겨지는 순간입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루가 9,47. 마르 9,36). 돈도 힘도 권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항변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방어할 줄 모르며 또 남을 공격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작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라고 예수님께서는 행동으로 보여주시며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게 보이는 것이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이, 작은 이, 겸손한 이로 사셨으며 박해받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바로 “가치전환”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기적을 실행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우리 가운데 받아들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일일 것입니다. 장애우 시설이 들어서면 NIMBY 현상부터 일어나는 세태를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이런 행동은 장애우와 그 가족을 두 번씩이나 상처 입히는 것이 됩니다. 우리 각자도 ‘미래의 장애우’ 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장애는 돌발적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영적인 소경일지도 모릅니다. 각자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겉으로 장애가 드러나는 이들과 더불어 지내는 일이 조금도 불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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