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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행복선언과 지복직관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3 조회수782 추천수3 반대(0) 신고
 

<행복선언과 지복직관>


  우리는 루가와 마태오복음서에서 나오는 행복선언이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 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선언을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복음서 저자들도 예수의 제자들이 그 선언을 처음엔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기술합니다. 부활의 조망 아래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부활이후에 이르러서야 제자들은 지상에서 자신들과 함께하셨던 분의 정체를 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정황을 요한복음 14,26에서

“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실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상기시켜 주실 것입니다.” 라고 적습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진리의 영을 몸에 받은 것입니다. 그 진리의 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서 저자들은 나름대로 모아서 기록 전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가 저자는 행복 선언과 동시에 불행 선언을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현세에서 다 받아버린 상급에 미련을 두지 말고 앞으로 받게 될 구원을 희망하라는 뜻입니다. 마태오 저자는 예수께서 여러 기회에 말씀하신 내용을 한 곳에 모아 산상설교 형식으로 편집하였습니다.


  마태오복음의 행복 선언을 교부들은 하느님 나라의 지복직관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누리는 행복” 이라고 교부들은 해석했습니다. 이런 상태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복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至福直觀(하느님을 직접 뵙는 복된 상태, Visio Beatifica) 이야말로 천국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때에는 지상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거울에 비치듯이 어렴풋하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나마 창조주 하느님을 뵈올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찬양하고, 天上 전례에 참례할 것이라 합니다. 그 상태를 한 자락이나마 보여주는 것이 眞福八端이라는 것입니다. 교부들은 의로운 성인 반열에 든 분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상태가 지복직관이라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전례에 참석하는 모습을 요한 묵시록 4 장과 21 장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위로를 받으며, 그분의 약속이며 계약인 땅의 상속을 받으며,  하느님의 의로움이 펼쳐져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소될 것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며, 하느님 앞에서 뵙고 전례에 참석할 것이며, 예수님과 같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참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우리가 복되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는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급을 받게 만드는 “영적 가난, 슬퍼함, 온유함, 의로움에 굶주림, 자비를 베풂, 마음으로 깨끗함, 평화 이룩함, 박해받음”과 같은 인간의 자세가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인간의 행동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오는 전인적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어렵다고 중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완성(텔레이오스)하는 자세를 지니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구성하는 것으로 육체와 정신(혼) 그리고 영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상처럼 정신과 육체를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나누어 지지 않는 전체로서의 육신과 정신을 인간의 구성조건으로 보았습니다. 육신도 정신도 함께 있어야 완전한 인간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靈(pneuma, ruach)은 精神(혼,psyche, nepesh)과 肉體(sarks, basar)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 앞 단어는 그리스어, 뒷 단어는 히브리어임


  영은 하느님께 받은 생명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온전히 지키고 다시 돌려 드리는 자세가 요청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영을 받았으나 간혹 영을 족쇄 채워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영을 받지 못한 듯이 행동합니다. 영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영을 전혀 경외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영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영으로 사는 자세입니다. 영은 또 질서를 뜻합니다. 개인이 제 나름대로 갖는 정신이나 마음의 질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질서, 우주의 질서를 가리킵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질서는 영의 가르침에 따르는 길입니다.

  마태오가 말하는 ‘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가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대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차원은 우리 인간이 곧 바로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영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가난한 자는 자신의 가난을 무작정 원망하지 않습니다. 헛되게 부자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다음날 먹을 만나를 미리 거두어들이면 다 썩어 버리듯 욕심으로 채우는 富는 우리 안에 계시는 영의 명령에 맞갖지 않은 행동입니다. 건전하게 노력해서 얻어지는 富만을 쌓되 그것도 덜어낼 줄 아는 지혜를 갖는 것이 ‘영으로 가난한’ 생활이 아닐까합니다.

  어느 신부님은 공동 번역에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이라고 번역한 것을 매우 못마땅하다고 술회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하더라도 마음은 부자여서 넉넉하게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설명입니다. 마음마저 가난에 쪼들릴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영으로 가난하다’  라고 원래 그리스어 본문(ptochoi toi pneumati) 대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분의 의견대로 200 주년 기념 신약성경에서는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새 성경에서는 아쉽게도 다시 ‘마음’ 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영으로 가난하다” 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 요청하는 질서 있는 행동, 창조하는 행동, 삶의 에너지를 지닌 행동이 요구됩니다.


  “마음으로 깨끗함” 도 마음을 정신이라고 알아듣기 보다는 ‘가슴’ 이라는 뉘앙스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스어 본문도 심장을 가리키는 cardia 입니다. 우리말에 ‘가슴이 따뜻하다.’ 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그저 생각과 이성을 가리키기보다는 행동을 수반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언어 습관은 모든 단어에 동작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슨 말에나 반드시 실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동사에서 명사가 된 단어들이 대부분입니다. 말이란 반드시 실행에 옮겨져야 그 역할을 한다고 믿는 그들이었습니다.


  마태오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응답하는 정의를 선포합니다. 인간의 정의는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은총론(오직 은총, sola gratia)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여 마태오복음을 평가 절하하기도 하였습니다.


  “슬퍼함” 은 인간이 본래 피조물로서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도 스스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자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처지가 헛되고 무상하다는 자각을 슬픔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알게 되는 첫 걸음입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해야만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참회하는 자세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할까 염려하는 자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구원 의지만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가는 ‘우는 사람들’ 이라고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하나 마태오는 여기서도 영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함” 은 겸손하다는 뜻입니다.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형제라는 의식입니다. “聖靈七恩” 중 효경의 은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특별히 우월한 존재가 아니고 그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겸손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그러니 모든 옳고 그른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은 영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이 온유함의 본보기가 바로 민수기 12,3에서 말하는 모세의 겸손함입니다. 이때 성서 표현이 anaw 입니다. 온유함(praeis) 이 anawim 을 번역한 것이니 그 뜻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름” 이라는 표현은 바로 마태오 저자의 신학 사상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올바로 이 땅에 실현되지 못하는 까닭이 우리 자신이 부족해서라는 자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각을 한 자라야 굶주리고 목마르다는 표현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잘 못하는 것보다 내가 잘 못하는 것이 더 크다는 자각이 바로 이 표현입니다. 그리고 실천에 옮길 줄 아는 행동력이 바로 굶주림이고 목마름입니다. “목마른 자만이 우물물을 파는 법이다.”


  “자비를 베풂” 이것은 하느님을 닮으려는 자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구약에서는 rahamim(자궁과 같은 어원), 또는 hesed(모성애) 라 표현하는데 이는 모두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지극한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도 이웃에게 베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깨끗함” 은 안팎으로 한결 같아 흠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거룩한 전례에 참례할 때 인간이 지녀야 되는 바른 몸가짐을 마음이 깨끗하다(katharoi)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분심 드는 일 없이 온 마음과 행동으로 아버지께 오롯이 바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럴 때라야 참된 봉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심없이 참된 봉헌을 할 때 참된 정화(英,catharsis) 가 일어납니다.


  “평화 이룩함” 은 영어로 peacemaker 라고 번역됩니다. 그저 전쟁이 없고 다툼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질서를 우리 사회에 구현하는 실천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외쳤던 목소리를 지금 우리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야합니다. 올바른 평화가 무엇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요한복음 14,27에서 “나는 평화를 여러분에게 남겨 두고 갑니다. 내 평화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또한 낙담하지 않도록 하시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실천으로 나타나는 평화 구현을 마태오 저자는 강력히 요청합니다.


  “박해 받음” 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이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할 때 겪게 되는 곤란을 박해로 말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 박해는 그 당시 마태오 공동체에게 아주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가뜩이나 가난했던 그들은 삶의 터를 모두 빼앗기고 생명마저 위협 받았습니다. 심지어 처형까지 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했습니다. 눈앞에 닥친 박해를 의연히 그리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와 같은 박해는 없습니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악마의 훼방이 바로 박해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이 바로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하느님 말씀보다 우선하려는 유혹, 자신의 능력을 만방에 떨쳐보려는 유혹, 목적을 위해 타협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타인들을 지배하려는 세 가지 유혹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유혹이 바로 현세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악마에게 받는 시련입니다. 더욱 교묘하게 덤벼드는 악마는 이제 ‘문화와 시류’ 라는 탈을 쓰고 다가옵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나서는데 왜 나만 힘든 길로 가야 되는 지 고민하게 됩니다. 이런 갈등은 이제 폭력처럼 우리 내부에서 자라나 우리 자신을 윽박지릅니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깨우쳐 주지도 않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 점점 소수집단이 되고 맙니다. 이 점이 더욱 괴로운 시련입니다.

  이때 내안에 자리하고 계시는 성령이 목소리를 내셔야만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혹 사화에서도 천사가(성령이) 도움을 주지 않았던가요? (마르 1,13. 마태 4,11) 우리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유혹이라는 박해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위에 말한 여덟 가지 자세가 제대로 실행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지복직관이라고 교부들이 재해석 하신 것입니다.



연속듣기/Richard Clayd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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