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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4 조회수716 추천수2 반대(0) 신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3-15)


  요한복음 3장은 음악으로 비유하면 서곡 부분에 해당합니다. 서곡은 곡 전체의 주제를 미리 들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더 아름답고 자주 연주됩니다.

  요한 저자는 니코데모라는 바리사이 학자를 등장시켜 구약의 가르침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열어 보이십니다. 3,13-15절을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한 말씀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학자에 따라서 다릅니다. 몇몇 분은 3장 13-21절과 31-36절을 요한 저자의 주제 설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위로부터(anothen)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어떻게 늙은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 다시(deuteron) 들어가 태어날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즉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위로부터 태어나다.’ 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그런 오해가 일어났던 겁니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이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실체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3절에 이르러 내려오다(katabaino)와 올라가다(anabaino)는 동사로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특히 올라가다 동사의 완료형을 사용하여 확실함을 나타내십니다. 이 표현은 강생과 수난, 부활에 대한 下/上 표상을 보여줍니다. (* 前/後 표상도 참고)


  구약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니코데모에게 민수기21,4-9절의 구리 뱀 이야기를 들어 죽을 위험에 빠졌어도 들어올려진 분을 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죽음으로 괴롭히던 그 존재를 매달아 그들을 모으는 구심점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이것을 통해 하느님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보면 살아날 것이라는 하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십자가에 들어올려진 예수님을 통해 인간이 지닌 이중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서로 증오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이며, 인간의 삶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고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사랑의 영광이 찬란히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힘이 우리를 새로운 인류로 만드시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들어올리다(hypsoo) 라는 동사형태가 요한복음에서3,14; 8,28; 12,32.34. 등 4회 쓰이는데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지 않는 요한 저자의 독특한 신학사상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십자가의 현양’이라고 부릅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바오로 서간과 다른 복음서에서와 달리 믿음(pistis)이라고 명사형을 한 번도 안 쓰고 믿는다(pisteuo)라는 동사형만을 쓰는 것도 요한저자의 특징입니다. 이는 믿음을 지식처럼 여기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일부 뉴 에이지파 즉 신영지주의자들이 몇몇 용어를 들어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실은 요한복음은 영지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는 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믿는다.”는 무언가 사실이 아닐 것 같은 내용을 믿어보려 노력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고, 무덤에서 일어 나셨으며, 하늘로 올라 가셨다는 등의 특별한 제안을 한 번 받아들여 보자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각자 변화가 일어나는 체험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그만 변화일망정 놓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려는 투신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처럼 ‘뜨거운 마음’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형제들과 나누려 공동체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닥칠 십자가를 예수님을 본받아 그대로 지고 가는 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여주고자 노력하셨던 십자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단 하나의 새 계명의 실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영원한 생명은 이 계명을 실천한 뒤에 저절로 따라오는 상급일 뿐입니다. 어느 신부님은 영원한 생명을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이라고 강론하십니다. 그야말로 시간이 지속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생명의 본질을 무시간성 아래에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말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라고 하듯이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일반적인 시간개념과 관계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시간을 초월하고 죽음마저도 초월하여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 희망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죽음마저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행위로서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와 십자가가 지닌 성사적 의미에 우리도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믿음의 시각으로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죽음도 죽음이 아니고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 라너 ‘죽음의 신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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