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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Stabat Mater dolorosa - 생명의 위로-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5 조회수803 추천수7 반대(0) 신고
 

   (Stabat Mater dolorosa)

아들예수 높이달린 십자곁에 성모서서 비통하게 우시네.

독생성자 수난하니 여인중에 복된성모 애간장이 다녹네.

우리죄로 채찍모욕 당하시는 아들예수 성모슬피 보시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맘속에 주님상처 깊이새겨 주소서.

십자곁에 저도서서 성모님과 한맘으로 슬피울게 하소서.

주님상처 깊이새겨 그리스도 수난죽음 지고가게 하소서.  -추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5-27)


 우리가 흔히 ‘스타바트 마테르(서계신 어머니)’라고 제목을 짧게 부르는 노래는 Jacopone da todi라는 분이 지은 시에 여러 작곡자들이 곡을 붙여 만든 작품입니다. 그러니 ‘~의 스타바트 마테르’라고 칭해야겠죠. 페르골레지는 26세 때 여성합창곡형식으로 이곡을 작곡하고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롯시니와 드보르작이 작곡한 곡도 자주 연주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갈바리아 십자가 형장에 제자들 중에 요한만이 성모님과 여인들과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제자들도 곁에 있었는지 아닌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했을 겁니다. 사실 요한복음서에서 제자 요한에 대한 언급도 오직 수난과 부활의 문맥에서만 나옵니다.  모든 초점을 예수님께 두려는 의도였기 때문입니다. 또 복음서 저자들은 성모님에 대한 기록도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두루 살펴보아도 의외로 성모님에 대한 언급이 적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일부 교파에서 성모님 공경을 폄훼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복음말씀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여인이여”하고 호칭했다는 것을 근거로 마치 예수님께서 성모공경을 제한하신 것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그리스어 'Gyne' 란 단어의 의미가 여자, 부인, 신부 등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또 그 사용례를 살펴보면, 함부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존칭하는 의미가 실려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님을 이제 부터는 당신만의 어머니가 아니고 모든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라고 일반화시키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어머님을 부르시어 이 제자를 아들처럼 여길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서 모든 교회와 제자들을 아들로 사랑해 주시는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베푸신 그 큰 사랑 그대로 모든 제자들을 돌보아 주시길 바란 것입니다. 당신께서 성모님께 받은 사랑을 극도로 존경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만한 능력과 가치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신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 요한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때부터 제자가 자기 집에 모셨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집에’라고 번역된 ‘eis ta idia’ 를 어느 신부님은 그리스어 원래 뜻대로 ‘자기 것에게, 本心으로, 자기 마음에, 자아 속에’라고 생각해보자고 하십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자아에 모셨다." 즉  미래의 제자들인 우리들에게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 저자는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심장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성모님을 한 인격체로 묘사했으며 구세사적 위치를 확고하게 드러냅니다.

  그 중에서 11,27-28.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 대답하십니다. 그 뉘앙스는 이렇습니다. 군중 속에 있던 어느 여자가 외치는 것은 단순히 당신을 낳고 젖을 먹여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다, 성모님이 행복하신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루가복음 1,38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는 구절을 연결시켜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내신 모든 삶의 현장에 성모님께서 계셨을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수난과 십자가 현장에는 더더욱 그러했을 겁니다. 보통의 어머니라도 그러했을 텐데 성모님께서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C.M. 마르티니추기경은  저서인 ‘마음의 밤과 낮’에서 이 십자가형장 아래 예수님과 성모님의 대화 장면을 “생명의 위로”라고 적습니다.

  그 밤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숨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도 않았고, 인간적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절망하거나 경악하며 외치지도 않고, 굳은 자세로 머무르십니다. 아니 그냥 단순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달으십니다. 마리아는 신비적인 경험을 통해 그 순간이 “구원의 역사에 결정적인 순간임”을 깨달으십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변함없이 항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생명의 위로”가 주는 선물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A. Vivaldi(1687~1741)
Stabat Mater RV 621
Stabat Mater dolorosa  
Aafje Heynis, contralto


 

Perogolesi  Stabat M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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