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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쁨을 선물하시는 주님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9 조회수685 추천수4 반대(0) 신고

 

<기쁨을 선물하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루가 7,13-16)


  제가 아는 할머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 할머님은 벌써 수 십 년째 매일 새벽에 미사 참례를 하고 계십니다. 거의 모든 본당에 그런 할머니 열 댓 분쯤 계시는 것이 당연하고, 또 바로 그런 분들의 기도 덕분에 본당이 잘 이끌어져 나간다고 신부님들이 고백하십니다.

  그 할머님은 나이에 비해서 아주 정갈하고 정신이 말짱하십니다. 그래서  5-60대 젊은? 아주머니들이 아직도 ‘형님’하고 부르며 따릅니다. 구역 모임에도  꼬박 나오신다고 합니다. 대부분 그 할머님께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시고 매일 미사에 나오시는 이유를 잘 모릅니다. 바로 그 할머님의 장남이 거의 죽었다가 살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술에 약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던 아들이 결혼하고 사업에 한창 바쁠 나이에 그만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술 마시고 올림픽대로를 새벽에 달리다가 깜박 졸면서 그만 가드레일을 들이박는 사고가 났더랍니다. 그 아들이 사고가 난 것도 모르고 잠시 있었는데 정신이 들어 보니까 어디서 낯익은 사람이 자동차 핸들에 엎드려 있는 게 보이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제 몸이더랍니다. 아 내가 죽은 거로구나 하는 생각에 몸을 더듬어 보니 아픈 데는 아무데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소리도 안 나며 그저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어둡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밝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상태로 있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며 자기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지고 그 순간 영화 ‘사랑과 영혼’ 에서 혼령이 빠져 나가는 것과는 반대 로 휙 하고 자신이 몸속에 딸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119 구조대가 간신히 차문을 부수고 자기를 꺼내 주는데 약간 정신이 몽롱할 뿐 별 이상을 못 느꼈다고 합니다. 차는 완전 폐차 되었으나 몸은 기적적으로 조그만 뼈도 골절된 곳이 없이 그저 심한 타박상만 입었다고 합니다. 그 아드님은 이 사건이 난후에 모든 것이 어머님께서 기도를 열심히 해 주신 덕분이었노라고 고백했답니다. 자신이 주님께 제 2의 생명을 선물 받았다고, 덤으로 받았다고 말한답니다. 그러니 주님 뜻에 알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열심히 산다고 합니다.

  독실한 구교 집안이셨던 할머니는 늘 묵주를 끼고 사셨으며 평생토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모님께 기도하고 계신 것을 그 아드님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 장교로 전국을 누비며 근무하셨던 할아버지가 늘 걱정되었고 월남전에 파병되셨기에 더 열심히 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대쪽 같으신 할아버지 성격을 할머님의 온화한 성격으로 감싸주셨다고 아들은 표현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삶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실은 감추어진 실체의 일부분 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믿으려합니다. 그 할머님도 사려 깊으신 분이라서 이 이야기를 입 밖에 내시지 않는 답니다. 더욱이 그 아드님이 진짜 죽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기에 조심스럽게 혼자 마음속에만 간직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는 삶의 영원성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신비는 삶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을 피상적으로만 사는 사람은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가느다란 실마리입니다. 신비를 만나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의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신비는 날라 가는 새를 통해서도, 백합꽃을 바라보면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친구와 적, 부모와 연인과 아이, 심지어 독수리와 말 등과 같이 삶을 지닌 모든 것에서 신비를 발견하려 애쓰고 있으며 그 모든 것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비를 통해 어떤 지혜와 깨달음을 얻었다고 우리가 겪어내야 할 인생의 고통이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났던 나인 과부의 그 아들도 여전히 죽었을 것이며, 인간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랑하던 라자로의 소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잠든 것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죽음이 잠든 상태이기에 오늘 복음에서도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고 깨우신 것입니다. (일어나다, egeiro, wake up)


  상실의 고통 속에 있는 과부에게 아들을 되돌려 주는 일은 삶이 바로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삶이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다면 상실의 고통이 새로운 의미로 바뀔 수 있을 겁니다. 발견이라는 것은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 내기보다는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일일뿐입니다. 그것이 각자에게 어떻게 다가오든 간에 기쁨으로 맞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과부)와 외로운 자(외아들마저 잃은 자)를 구하러 오셨다는 사명을 이 자리에서 구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과부에게 그 약속 대로 기쁨을 선사하셨기에 모두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아멘.

 

 

출처;야후블로그<시와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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