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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설의 삶 / 민성기 신부님 * (펌)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19 조회수806 추천수5 반대(0) 신고
 

 

 

               <역설의 삶을 살다가신 민 성기 (요셉) 신부님 (좌측) >

 

 

                        역설의 삶


  우리말에 ‘떠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 ‘보헤미안’과 비슷하게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여 세워진 계획이나 특정한 목적이 없이 자유로이 유랑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에 반해 ‘나그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을 가진 여행자입니다. 서양의 탄호이저와 비슷하게 돌아갈 곳이나 가야 할 곳이 있는 사람으로, 종교적인 신앙심을 지니고 깨달음의 세계를 찾아 여행하는 ‘순례자’를 가리킵니다. 어쩜 오늘을 사는 우리는 깨달음의 세계를 얻기 위해 순례하는 나그네일지 모릅니다.


  이왕 ‘나그네의 길’을 걸어갈라치면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삶’을 ‘역설의 삶’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역설이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진리에 모순되는 의견’ 또는 ‘언뜻 보기에는 진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사실은 그 속에 일종의 진리를 품고 있는 말’로 풀이됩니다. 한마디로 기존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삶이 ‘역설의 삶’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또는 ‘이것 아니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틀을 깨뜨리는 ‘틀 상실’ (Paradigm lost), ‘낙원 상실’(Paradise lost)이 바로 역설을 사는 첫걸음입니다. 따라서 역설의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의 삶의 양식이 무엇인지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성서신학에서는 시간을 크로노스(Cronos, κγουοs)카이로스(Kairos, καιροs)로 나눕니다.

   크로노스는 사람이면 누구 할 것 없이 똑같이 분배된 시간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를 흘러가는 시간 또는 물리적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을 양(量)으로 따질 수 있기에 양의 시간, 양적인 시간이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강의가 11시부터 12시까지 1시간 동안이라고 한다면 강의에 함께 하는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똑같이 1시간이라는 양이 주어집니다. 또한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5시간 걸린다면 같은 기차에 탄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이 똑같은 5시간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양으로 잴 수 있는 시간을 크로노스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카이로스는 성서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관련이 깊어 성서적 시간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복음이 봉독될 때, ‘그때 예수께서는…’ 하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는 바로 그 때 바로 그 시간(the right time)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등장하실 바로 그때는 무엇인가 기적이 일어났다든지 치유가 행해지는 바로 그러한 특별한 변화가 일어난 시간이며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라 하여 ‘질(質)적인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꽉 찬, 때가 꽉 차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완성의 시간(the fullness of time)이며 그로 인해 어느 누군가에게 생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시간인 크로노스적인 시간대에서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는 카이로스를 살아야 합니다. 이 카이로스를 살아가는 삶을 역설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게 카이로스를 사는 사람이 깨달음의 세계를 찾아가는 나그네일 것입니다. 

  인간생태학에 의하면 공간(distance)을 물리적 공간(physical d.), 문화적 공간(cultural d. = accessibility) 그리고 조작적 공간(manipulated d.) 세 가지로 나눕니다.

 

  물리적 공간은 여기서 저기까지 자로 재면 얼마이다 라는 등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똑같은 길이 값이 나오는 공간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책상의 폭이 얼마이고 건물의 높이가 얼마라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문화적 공간은 통신 및 교통 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기존의 먼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TV, 라디오 그리고 컴퓨터 인터넷 등의 통신수단의 발달과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등의 영향으로 예전에 공간과 공간 사이에 걸렸던 시간이 짧아졌을 때 이를 문화적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조작적 공간은 서로 가까워 하나였던 공간이 어느 장애물로 인하여 갈라져 거리 상 멀리 떨어지게 된 공간을 다시금 새로운 매개체를 이용하여 본래의 모습인 가까운 공간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 이를 조작적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가령 한 동네였던 마을에 철로나 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마을이 두 부분으로 갈라지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럴 경우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갑과 을의 공간적인 간격이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되었을 때, 육교나 굴다리를 놓아 장해물로 인한 갑과 을의 공간적인 떨어짐을 다시 회복시키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물리적 공간은 어느 누구나 똑같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 등을 배움으로써 문화적인 충족을 지니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진 것을 다시 하나로 엮어가려 노력하는 조작적 공간을 살아가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작적 공간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배움이란 나뉜 것을 하나되게 하는 작업이라고 그랬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깨달음의 세계로 한발, 두발 다가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나가야 합니다. 갈라진 모든 것을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또한 우리는 남(das Man)이 아닌 나(der Mann)를 찾아야 합니다. 하이데거(Heidegger)의 용어를 빌면, 자신을 잃고 평균적인 인간으로 퇴락된 상태의 인간을 ‘남’이라고 합니다.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해야 합니다. 남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남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행동하고 있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남’입니다. ‘남’이란 누구도 아닌 인간, 각자의 독자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합니다. 독일어의 정관사 der는 인간을 이야기하지만 das는 인간이 아닌 중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Mann과 Man을 비교해 보면 Man에는 Mann에 있는 -n이 하나 빠져 있습니다. 결국 인간도 아닌 -n, 뭐가 빠져있는 즉 나사가 빠져 있는 인간을 남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깨달음의 세계를 가야지 남이 갈 수 는 없습니다. 그래 나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잡지, TV 등 매스컴을 통해 많은 것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는 것을 일반적인 앎(natural awareness)이라 부릅니다. 어쩜 이 앎은 상식적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지식일 것입니다. 그래 획일적인 눈으로 세상의 기준, 세상의 논리에 의거하여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지적으로 폼을 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앎은 자랑할 수 있는 성질의 앎이 아닙니다.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비록 상식화된 앎이라 하더라도 정말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군중심리에 의해 헐값으로 매겨진 잘못된 앎인지, 허위인지를 회의하고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분별력을 지니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앎을 비판적인 앎(critical awareness)이라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식별할 수 있는 식견을 지닌 앎이 깨달아 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필요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앎에서 비판적인 앎에로 깨달아 나아가는 의식의 활동을 해방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의식화(conscientiation)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식화가 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흐름을 올바르게 꿰뚫어 읽고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그렇게 의식화되어야 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성인은 「神國」에서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묵은 인간과 새 인간이 그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육적인 인간과 영적인 인간입니다. 결국 의식화 즉 의식의 변화란 묵은 인간에서 새 인간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육적인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바의 방심(放心)에서 구심(求心)으로의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제주도 이시돌 피정의 집에서 만난 시인 홍종범의 시,「나의 발」을 묵상합니다.


나의 발


내가 두발로 걷는다고

선조들처럼, 그대들처럼

두 발로 걷는다고

그대들의 습관을 강요하지 말라.


나도 그대들처럼 두 발로 걷되

그것은 나의 발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의 핵심은 해방의 삶이요 자유의 삶입니다. 이렇게 깨닫기 위해서는 애착(attachment)의 삶이 아닌 이탈(detachment)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조성기 선생님의 단편소설, 「통도사 가는 길」에서 주인공이 서울을 떠나 통도사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할 곳이 있으니 그곳이 물금입니다. 주인공은 상실? 거부? 갈등? 차단? 억압의 현실인 서울을 떠나 아무것도 금하지 않는 세계인 물금(勿禁)을 거쳐 통도사에 이릅니다. 모든 것이 통도(通度)에서 완성됩니다. 작가 조성기 선생님은 우리의 삶을 금(禁)의 시대로 보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넘어서는 초월의 지평을 암시하였습니다. 禁을 사는 것을 애착이라 하고 물금을 사는 것을 이탈이라 하니 결국 이탈을 살아야 자유와 해방의 삶, 해탈과 중도(中道) 및 하늘나라를 사는 삶, 즉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크로노스(cronos)가 아닌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살기 위해서, 물리적 공간과 문화적 공간을 넘어 조작적 공간을 살기 위해서, 남(das Man)이 아닌 나(der Mann)를 찾아서, 방심(放心)이 아닌 구심(求心)으로, 일반적인 앎이 아닌 비판적인 앎으로 의식화될 나를 찾아서, 애착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삶,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코인시던스(coincidence)를 살아야 합니다. 이를 불교 용어로 편재(偏在)라 합니다. 편재의 사전적인 뜻은 ‘두루 퍼져 있음’입니다. 세상을, 세상 사람들을 표면적으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견(見)이 아니라, 올바르게 꿰뚫어 보는 관(觀)을 사는 것, 이것이 편재입니다. 먼지 속의 우주를 깔고 앉아 먼지 밖의 우주와 어울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물과 두루 합일되는 것입니다. 모래알과 만나면 모래알이 되고, 물방울과 만나면 물방울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되고 별똥이 되고 민들레가 되고, 바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내 옆에 있는 네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편재입니다.


  나그네로서의 삶을 사는 삶의 양식을 역설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설을 살자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있’게 해주는 삶, 즉 세상을 풍요롭게 아름답게 살맛나게 하는 것이 역설이니 결국 사회와 종교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역설입니다. 사회를 살맛나게 하는 양념이 바로 역설입니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가 우리를 지배하면서 흑백논리를 살도록 조장하여 우리의 사고는 경직화되고 우리의 정신은 병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역설적 사고 없이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밝고 건강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역설을 이야기하고 역설을 사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원론적인 흑백논리가 아니라 역설을 살아감으로써 편재의 세계, 코인시던스(the coincidence of opposites)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으면 합니다.


           - 출처: 고 민성기(요셉) 신부님의 강의록 중에서(http://min0319.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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