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오늘 복음묵상]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석양은… /이기양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0 조회수903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6년 9월 20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9월 17일 주일에 경축 이동을 하지 않은 곳에서는 대축일 미사를 드린다.>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일부 실학파 지성인들의 학문적 연구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로마 교회처럼 초기부터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근 백 년 동안 일만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103명이 1984년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와 더불어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는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의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세대를, 서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놀이를 할 수 없는 어린이들과 같다고 한탄하십니다

 

☆☆☆

 

 사랑에 관한 수많은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정의만큼 명확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참아 주는 것, 기다리는 것, 성내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것……. 내가 과연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알려고 하면 바오로 사도가 내린 이 정의에 자신을 대입하면 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참아 주었고, 기다렸고, 친절하였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었습니다. 그 정도에 따라 우리의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두리째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놓으신 주님의 사랑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정도만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석양은…



   아침에 강론을 준비하는데 갑자기“나는 왜 신부가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렸을 때 자라난 환경이 어  떠 했길래 사제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저의 고향은 행주입니다. 바로 앞에 행주대교가 있는 곳인데 늘 한강이 보였고 들과 산이 있었지요. 지금도 어릴 시절을 떠올리면 석양이 지는 들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유난히 해 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석양의 풍경을 많이 보아서 제가 종교인이 되었을까요? 해 뜨는 모습을 많이 보았더라면 사업가가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면 늘상 해질 무렵까지 친구들과 놀다가 어머니가 부르셔야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특히 석양 낙조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해는 질 때 서서히 내려가다가 한순간에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해가 지금 막 지는구나.”이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과학적으로 해는 방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8분 전에 이미 지고 없습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가 8분이 걸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지는 해를 보고 지금 방금 사라졌다고 8분의 시차를 망각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고서도 “별이 참 아름답구나, 저기 저 별이 빛나고 있구나.”생각하고 감탄하지만 그 별 중에 어떤 별은 벌써 수천 년 전에 없어진 것도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없어진 별의 빛이 여기 지구에 오기까지 수천 년이 걸린 셈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들이 다 맞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 대해 우리는 확신하며 주장하고 말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거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면 전혀 다른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접하고 놀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일 힘든 것이 있다면 자기는 절대적으로 다 맞다 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주장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화가 나신 모습입니다.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는데 이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는 예수님을 더욱 불신하고 죽여 없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을 두고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생각을 합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미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보고서는 맨 날 먹고 마시기만 하는 모리배로 비판을 하지요. 아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였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기준에 맞지 않으면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왜 그토록 예수님을 비난하고 반대하였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을 지나치게 믿었습니다. 제대로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났다고 교만했던 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스스로를 높이고 으스댔던 그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을 처형하고 마는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중심의 틀과 교만함을 벗어나지 못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제일 경계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신관이나 신앙 논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래된 본당에 가보면 이런 신자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다 판단을 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또 이렇다 저렇다 하며 하느님까지도 판단을 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처럼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어려움을 만듭니다.


   순수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배우면서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나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보고 말하며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두고 왜 본당 신부 또는 수녀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를 좀 더 사려 깊게 묵상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목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의 신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신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당장 눈앞의 것을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10년 후, 100년 후를 바라보는 긴 안목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에 안주하면 그 때부터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기가 쉽습니다. 새롭게 배우려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늘 귀를 기울이고 동시에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 가지라도 더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사리들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무조건 판단하고 자기와 같지 않으면 모조리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매일 새로워지고 열린 마음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평일미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미사에 참례하고 말씀을 경청하며, 또 그 말씀으로 하루의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매일매일 미사 중에 새로운 다짐을 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런 노력들이 나를 성장시키고 보다 더 많은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바탕이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중심으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귀 기울이는 우리들 열린 모습 안에서 지금 뿐만 아니라 미래 우리 공동체의 힘찬 모습을 찾아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