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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창강 강가에서 / 류해욱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0 조회수875 추천수6 반대(0) 신고

                                  <로스 알라모스 성당 입구에 놓여진 푸르른 식물들>

 

                                                                                   <리오그란데스 강>

 

 

평창강 강가에서

 

오늘은 모든 예수회원들에게 특별한 날이지요. 사부이신 성 이냐시오께서 이승을 떠나 하느님 품에 안기신 날을 기념하는 대축일이지요. 그런데 2년 전부터 저에게는 더욱 특별한 날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아버지, 이냐시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인연을 맺었던 안드레아라는 분이 2년 전 이승을 떠나 영원을 향한 여정에 오르신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어제 밤 가족들과 기일 미사를 하고 오늘 아침 길을 떠나 평창강을 향했습니다. 2년 전에 저는 진부에서 제 3수련 마지막 피정을 앞두고 준비 중에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간단한 파티를 하려는 시간에 전화가 걸려왔고 저는 직감으로 알았지요. 아버지께서 영원을 향한 여정 길에 오르셨는다는 것을. 예상대로 매우 위독하시다는 전화였고, 제천까지 가는 도중에 영면하시리라는 생각을 했지요. 아름다운 평창강을 따라 오는 중에 다시 전화를 받았지요. 지금 막 운명하셨는다는 소식이었지요. 저는 차를 세우고 강가에 주저앉았지요. 막 떠오른 달빛이 은은하게 강을 비추기 시작했고 달빛을 받은 강물은 노란 금가루를 뿌린 듯 작은 여울을 이루며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아버지의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이제 당신 안에서 평안히 쉬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허물을 헤아리시면 누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자비로 받아주십시오.”


  흐르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이 아버지가 영원을 향해 떠나는 길을 제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강가를 따라 달려오면서 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계속 달빛이 저를 따라오면서 제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천천히 사부이신 성 이냐시오 축일에 아버지를 데려가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했습니다. 11년 전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어머니를 데려가신 그분께서 성 이냐시오 축일을 택하신 데에는 어떤 배려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제가 예수회원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사부 성 이냐시오를 본받으라는 뜻인지도 모르지요. 아버지는 열정과 따뜻한 마음에서 성 이냐시오를 닮았지만 성인처럼 따뜻한 마음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시는 분이었지요. 두 분이 지녔던 삶의 열정과 마음을 돌아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고요.

  저는 오늘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기도했던 평창강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서 주천을 지나 평창으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2년 전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며 희고 푸르게 반짝이던 강물은 장마로 흙빛이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강은 흐르고 있었고, 제게 뭔가 말을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강가 어디쯤 차를 세우고 미사를 드릴 장소가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그럴만한 장소도 없거니와 제 마음이 너무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게 추스르며 그냥 오랫동안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회원들에게 대축일이고 대개 회원들 모두 함께 미사를 드리곤 하던 날이지만 올해는 전체 행사가 없고 공동체별로 알아서 지내기로 했답니다. 저는 오늘 혼자 성 이냐시오 대축일 미사 겸 아버지를 위한 연미사를 드리기로 했지요. 성 이냐시오 축일을 혼자 미사 드리는 것은 처음이지만 저에게는 의미가 있고, 다른 회원들도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아 성 이냐시오가 어떤 분인지 짧게 나누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성 이냐시오의 초상화를 보면 대머리에 조금 고뇌하는 듯한 인상을 짓고 꾀죄죄한 검은 옷을 입은 무뚝뚝한 사나이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실 성 이냐시오는 그런 일반적으로 알려진 외모의 인상과는 달리 상당히 다정다감하고 아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가 얼마나 낭만적이고 열정을 지녔으면서도 단순하며 체계적이고 꼼꼼한 행정가이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신비가 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만나는 누구에게나 단순하게 복음을 가르쳤고 하느님의 사랑을 관상할 때는 기쁨에 춤추며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감성이 풍부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체험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영들을 식별하고 사람들에게 영적인 상담을 주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게 되지요. 회헌을 저술하고 예수회를 조직하고 통치하는 장상으로서의 역할을 뛰어나게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의 첫 동료들과 영신 지도 신부가 그것이 예수회를 위해서, 나아가서 교회를 위해 그가 해야 하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거듭 확인시켜 주었고, 또한 본인의 탁월한 식별로도 그것이 성령의 이끄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기꺼이 그 일에 투신했던 것이지요.
  3년 전에 정일우 신부님이 제 3 수련 30일 피정 중에 성 이냐시오 축일을 맞아 강론을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회원이 선택했겠는데 이냐시오의 특징들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첫 독서 신명기 30장은 식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죽음과 생명을 내어놓는다고 하며,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라고 하는데 무엇이 생명인지를 식별해야 합니다. 성 이냐시오는 식별에 귀신이었습니다. 무엇이 생명인지를 느끼고 무엇이 생명처럼 보이지만 생명이 아닌 것인지를 귀신같이 느끼고 알았던 사람입니다. 제 2 독서는 회심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냐시오는 바오로처럼 너무 강하고 완전한 회심을 한 인물입니다.”
  아예 그 날의 강론을 다시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래가 이어지는 그분의 강론입니다.

  이냐시오는 우리보다 세속적으로 훨씬 더 죄를 많이 지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마치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고 완전히 그 값진 진주인 예수님께 투신하게 됩니다. 원래 이냐시오는 열정이 대단한 인물로 임금에게 또 어떤 여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을 하겠다는 생각을 지녔는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바뀌어 그 정성이 이제 온전히 예수님께로 가고 예수님을 전부로 생각하고 살았던 인물입니다. 복음은 아마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는 구절 때문에 선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알다시피 이 구절로 프란스치코 하비에르를 설득시켰습니다.


  이냐시오 하면 제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인물, 성삼위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녔던 인물, 강생의 신비, 육화에 대한 독특한 비전을 보았던 인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인물 등등. 그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생각에 ‘사랑’입니다. 그는 사랑을 많이 지닌 인물입니다. 성인과 같이 살았던 회원이 성인에 대해 가장 깊이 인상으로 남는 것은 매일 그의 방 앞을 지나가면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회원은 성인이 자기만 사랑해 주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해 주는 것을 알고 놀랐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는 각 사람을 알았고 그 사람의 특징, 인간 됨, 또 성령이 각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었고 회원들이 자기만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밀가루 반죽해 본 적이 있습니까? 반죽을 해 보면 기포 같은 것이 생기고 작은 덩어리들이 생기는데 그 기포를 빼 주어야 하고 또 덩어리를 없애 주어야 합니다. 덩어리가 있으면 빵이 맛이 없어집니다. 이냐시오가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주무른 반죽 중에서 가장 덩어리 많았던 사람은 하비에르라고 합니다. 그는 처음 동료가 될 때도 힘들었지만 이냐시오가 영신수련 줄 때도 아마 가장 힘들었던 사람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을 주면서 산파 역할을 했는데 엄청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함께 고생하면 사랑이 생깁니다. 이냐시오가 하비에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인도에 보내는 것은 바로 자기의 짝을 보내는 것이었고 그로서는 참으로 아픔이 컸습니다. 하비에르도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냐시오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의 편지의 마지막 문구는 이렇습니다.


  “당신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당신의 것, 하비에르.”
  이것은 엄청 큰사랑의 표현입니다. 알다시피 하비에르는 이냐시오의 편지를 받으면 성인이 있는 곳을 향해 무릎을 꿇고 3일을 울면서 편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이냐시오에게 드러나는 특징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성격상 쩨쩨한 것은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고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다 쏟아 붓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예수님께 투신한 다음에는 자기의 온 열정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완전히 반해 버렸고 그와 맺은 인간관계 안에서 열정과 사랑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이냐시오의 영성이라는 말을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사실 이냐시오의 영성은 따로 없고 바로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영신수련을 하면서 몸으로, 경험으로 배우는 것은 바로 이냐시오의 영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성입니다. 이냐시오는 예수님을 잘 알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독특한 방법으로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영성이 있다면 예수를 살아가면서 생긴 영성입니다. 이냐시오는 교회에게,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물이고 보물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이냐시오의 핵심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하신다는 분명한 인식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예리고의 소경 이야기에서 소경이었던 사람의 반응이 아주 정확한 핵심을 꿰뚫는 반응입니다. “예수를 따르며 하느님을 찬양했다. 온 백성도 이를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예수님에게가 아니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냐시오도 그것을 아주 잘 인식한 인물입니다.


  3년 만에 제가 다시 정일우 신부님의 강론을 전해 드리는데 다시 전해드리면서도 제게 감동이 전해오네요. 사실 정일우 신부님께 조금 질투도 나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시니까 저는 다만 침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하.


  모쪼록 오늘 이냐시오 성인 축일을 맞아 여러분 모두 그분처럼 가슴에 열정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회 홈 페이지에서 / 지난 7월 31일은 이냐시오 성인 축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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