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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1 > “예수님, 제가 이렇게 삽니다” (1)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2 조회수896 추천수10 반대(0) 신고

 

 

 

                “예수님, 제가 이렇게 삽니다”



   1950년대는 누구나 다 가난했다. 6.25 후의 그 참담했던 생활은 보리밥이라도 굶지만 않는다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사실 그렇게 살았다. 봉급은 고사하고 밥만 먹여 준다 해도 얼마든지 식모살이를 했으며 머슴도 밥 먹는 재미로 뼈 빠지게 일했지 가을에 받는 새경은  별것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 시절은 가난한 청소년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뭘 사달라고 속없이 조르거나 떼를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 때 내 생일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나에게 무슨 반찬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시곤 했다. 그러면 그때마다 두부찌개를 주문했는데 내가 두부를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는 뜻도 있었다.


   어머닌 그때마다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 그리고 기껏 하신다는 말씀은 “길웅이, 넌 양띠에 정월생이라 먹을 것이 변변치 못 한 것이다” 하시며 내 팔자소관이 그모양이니 못 먹어도 남탓은 하지 말거라 하는 뜻으로 못을 박아 주셨다. 좌우간 난 생일이 돌아오는 것이 싫었다. 싫은 것은 생일뿐이 아니었다.


   수학여행철이 되면 부모님보다 내가 더 불안했다. 그래서 항상 내가 먼저 여행을 안 간다고 말을 꺼냈는데 집안 살림이 너무도 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돈을 달라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때마다 여행을 가라고 권하셨으나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인사치레 말씀이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내 쪽에서 여행을 간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식구들의 생일이 돌아오면 없는 살림에 생일치레 걱정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생일을 맞이하는 쪽에선 굉장히 불안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동생의 병으로 인해 여러 가지 속상하고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딘가에 돈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집안에 불화가 가끔 생겼다. 그래서 생일날은 이래저래 고역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이 되고 나서는 객지생활을 죽 했기 때문에 생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아무리 객지에 혼자 살아도 나는 내 생일을 결코 잊고 지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날은 무슨 원수를 갚기나 하는 듯이 술을 억수같이 퍼마셔서 인사불성이 된채 지내곤 했는데, 그것은 생에 대한 일종의 비관이었다.


   본래 나는 신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결국 엉뚱한 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었으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으며 기쁨도 없었다. 다만 신부가 못된 탓으로 섬마을 선생이 되어 열심히 봉사하긴 했으나 그러나 가난과 우환 때문에 상처 받은 마음을 그런식으로 달랬을 뿐이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신학생 때는 생일을 쇠지 않는다. 다만 영명축일이라 하여 세례명의 축일을 지내는데 그러나 요란스러울 것이 없기 때문에 부담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신부가 되고 나자 다시 ‘생일 콤플렉스’ 에 빠져서는 그 잘난 영명축일 돌아오는 것이 아주 불안했다. 아마 어렸을 때 눈치 보며 숨던 기질이 그대로 살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개 본당에서는 본당신부님의 영명축일을 가급적 성대하게 차려 주려고 한다. 또 그런 식으로 해서 이웃 본당의 신부님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나누곤 하기 때문에 그것도 일종의 품앗이요 또 신자들 편으로 봤을 때는 본당신부에 대한 당연한 예의요 인사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신자들의 마음도 편했다.


   사랑이란 늘 주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하는 것이 애덕이 될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받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 축일 같은 행사가 돌아오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지난 6월이었다. 미국에서 그 달 셋째 주일은 ‘아버지날’ 이었고 바로 그 주간 목요일이 내 영명축일이었는데, 내 축일을 아무도 모르는지 누구 하나 꽃을 달아 주는 이가 없었고 미사 중에도 누구 하니 기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원했던 일이요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는데도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참으로 별일이었다. 왠지 무시당한 기분이었고 쾌씸한 생각까지 들어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간이 잘 진행이 됐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마음이 영판 추저분해 졌다. (R)


  “예수님, 제가 이렇게 삽니다.”

http://my.catholic.or.kr/vegabond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소록도에서온 편지)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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