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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 > 괴짜수녀일기 / 보결생과 특대생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3 조회수852 추천수13 반대(0) 신고
 

                     보결생과 특대생

                      

 

   주님의 기도를 합송할 때나 노래할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있다. 넉 달 전에 세상을 떠난 권 택윤 사도요한. 그분은 대세를 받은 후 닷새밖에 살지 못했으나 다행이 그동안 신부님을 모시고 가서 가능한 모든 성사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때 그분의 손을 잡고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바치는데 숨쉬기조차 힘든 상태였던 그분은 내 손바닥에 엄지손가락으로 박자를 짚어가며 속으로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후로 이 기도를 노래할 때마다 내 손에는 그 감촉이 되살아나곤 한다.


   세 번째 방문 했을 때, 그분은 이미 응급실로 옮겨진 후였고 산소 호흡기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어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퉁퉁 부은 발에 꼭 끼는 양말이 무척 답답해 보여 양말을 벗기고 안경도 벗겨주었다. 그랬더니 환자가 옆에 앉은 딸을 향해 자꾸 자기 다리 부분을 가리키며 무엇인가 글자를 쓰는데 “발을 안 닦았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나는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무슨 농담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하기야 방문할 적마다 그분은 옷을 깨끗이 갈아입고 간신히 의자에 앉아 계셨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투병 중에도 그는 항상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잘 했다는 것이다. 그 흔한 진통제도 사양하면서. 한번은 문병 온 직원이 “사장님, 어서 회복 하셔 야죠” 했더니 “암, 그래야지. 저 통에 있는 걸 다 쓰면 되나?” 하며 산소통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임종 직전까지 농담을 했다는 그를 보며 세례명을 사도요한보다는 십자가의 성 요한으로 했으면 더 잘 어울릴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욕창으로 엉망이 된 등을 치료하려고 자기의 몸을 들던 수사들이 그의 몸이 너무도 가볍다고 하니 ‘가벼워서 천당에 갈 때 잘 가겠지요“라는 말을 하셨다지 않은가.


   권 씨가 대세를 받을 적에 왜 자기 부인은 같이 주지 않느냐고 했단다. 대세 후, 그는 부인에게 “나는 보결생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기분이구려. 그래서 나 같은 보결생하고 수녀님들이 놀아주지 않겠다면 어떡하지?‘ 하자 부인이 ”아니에요. 당신은 특대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오랜 투병으로 도(道)를 닦아서 인지 얼굴에는 언제나 미소와 평화가 가득했던 요한 씨. 참으로 후회 없이 짧고 굵게 살다간 오십 평생. 영안실의 꽃에 파묻혀 웃고 있는 젊은 날 찍은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바로 천국에 다시 태어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며칠 전, 예비신자 교리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미망인은 조의금을 포함한 삼천만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해 왔다. 그건,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애화학교 후원자였던 고인이 가장 소망했던 것이었다면서. (R)

http://my.catholic.or.kr/vegabond


 

  - 이호자 마지아 수녀(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前 애화학교장

 

 

                                                

                                              With solitary my wild g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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