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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길웅 신부님의 은총피정] 왜 때려 < 제 1 부 >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7 조회수1,013 추천수15 반대(0) 신고

                         

 

                         왜 때려 < 제 1 부 >

                                  

                                   강길웅신부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 다르며, 어른의 생각은 아이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이를테면 자주 아이스크림이나 핫도그만을 먹으려 하며 또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거나 오락실에 가서 하루 종일 지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게 하도록 자녀에게 허락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들은 쉽고 편하며 재미있는 길만을 선택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달프고 힘들며 눈물 흘리는 길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마태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귀한 자식 매 한 대 더 때리고, 미운 자식 떡 한 개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때리십니까? 사랑하니까 때립니다. 내 자식 좋은 사람 되라고 때립니다. 따라서 부모가 때리는 회초리의 의미를 모른다면 그는 자식이 아닙니다. “왜 때려? 아버지가 뭔데 때려?” 하고 대든다면 그 놈은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으면서도 애매하게 맞을 때가 있습니다. 맞을 이유가 없는데도 억울하게 눈물 흘리며 상처받을 때가 있습니다. 왜 맞습니까?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니까 맞습니다. 이걸 가지고, “왜 때려? 하느님이 뭔데 때려?” 하고 대든다면 그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5-6절에 보면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라고 했습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신다“ 그렇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만나는 어떤 아픔도 하느님이 사랑을 떠나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일을 시킬 때는 그 일을 할 만한 자녀를 골라서 시킵니다. 다시 말해 능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녀에게 일을 시킵니다. 아무에게나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부여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고 그 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가지고 자식이 “아버지는 왜 나만 시켜?” 하고 대든다면 그놈은 정말 주제파악이 안 되는 놈입니다. 시킬 만하니까 시킵니다. 내 자식이니까 시키며 “너‘를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는 애정이 있으니까  시킵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시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이 믿고 사랑하시는 자녀로 하여금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실제로 아픔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이걸 가지고 “하느님은 왜 나만 시켜?” 하고 대든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왜 시킵니까? 그만한 애정과 신뢰가 있으니까 시킵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아무에게나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에게 시험지 채점이나 환경정리를 시키기도 합니다. 이걸 모르고 학생이 “선생님은 왜 나만 시킵니까?” 하고 대든다면 그는 참으로 선생님의 사랑을 모르는 학생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시킬 만한 사람을 골라서 일을 시킵니다.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괜찮은 사람’, 그리고 당신이 예뻐하는 사람을 시킵니다. 이걸 가지고 “하느님은 왜 저만 시킵니까?” 하고 불평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느님의 깊으신 뜻을 알아야 합니다. 큰 사람에겐 큰일을 시키고 작은 사람에겐 작은 일을 맡깁니다. 능력이 큰 사람에겐 큰 십자가를 주시고, 능력이 작은 사람에게는 작은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가끔 착각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을 주시는가?” 하고 의심을 합니다.


   왜 고통이 주어지고, 왜 십자가가 주어집니까?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그만큼 믿으시고 능력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못 알았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도 오해를 했습니다. 사랑하시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선 저에게만 일을 시키셨습니다. 저만 주로 아기를 돌봤으며, 일만 있으면 조퇴하고 와서 동생을 보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설거지를 했으며 동생 기저귀를 빨았고 청소도 단골이었습니다.


   그때 당시. 어머니께서 시장엘 가시면 보통 네 시간, 다섯 시간이었습니다. 1950년대의 시장에는 구호물자로 나왔던 옷가지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돈도 없으시면서 구경하시느라 늦으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동생 보는 일은 저에게만 맡기십니다. “왜 저만 시킵니까?”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오히려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저만 나무라셨습니다.


   또 아기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신 뒤엔 방청소나 설거지를 깨끗하게 해 놔야 합니다. 정리를 안 해 놓으면 난리가 납니다. 저는 그래서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정말로 싫었습니다. 가출도 몇 번 했습니다. 어렸을 때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시더니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으로 발령받아 집을 떠날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본래는 신학교에 들어가 신부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도 어머니께서 브레이크를 거시어, 집에 빚이 많으니 빚을 갚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운명이 계속 어긋나게 됩니다.


   그때 제 여동생이 심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고치지도 못하면서 빚만 몽땅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청소년 시절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또 옷 한 벌 제대로 입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둘째라 늘 형이 입던 옷을 입었으며 형이 쓰던 책을 그대로 물려받아 썼습니다. 선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저는 가난했습니다.


   봉급을 타면 전부 집으로 보내야 합니다. 돈을 안 쓰기 위해 일부러 섬을 지원하여 섬 마을 선생이 되었지만 아무리 벌어도 갚아도 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한 달 이자가 보통 1할 5부였습니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버는 데도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밤이 아무리 길어도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빚을 다 갚는 데는 제가 선생이 되고 십여 년이 걸렸습니다. 참으로 고달픈 세월이었습니다.

<  제 2 부에 계속 >


 ♥사랑하는 만큼 기다리는 만큼♥ 中에서 『왜 때려』/ 강길웅 신부(소록도 본당 주임)

 

                                 

                             

                              With solitary my wild g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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