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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 괴짜수녀일기 / 어데로 갔니, 나의 ‘가이트 나운’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27 조회수666 추천수12 반대(0) 신고

 

                

 

 

                  어데로 갔니, 나의 ‘가이트 나운’

                          


   별것도 아닌데 유별나게 애착이 가는 물건이 있다면, 내게 있어서는 다 낡아빠진 샤프펜슬이 그것이다. 이 샤프펜슬을 쓸 때마다 가끔씩 나는 이것을 선물한 21년 전 고등학교 셀(Cell)반의 개구쟁이 까까머리들과의 기억을 더듬게 된다. 어째서 이 물건만은 여태껏 내 주위에서 없어지지 않고 있을까? 신기한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조금이라도 애착을 가지려 하면 영락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치워 주시는 분이 계시는데도 말이다. 혹시 그분이 이 물건의 존재를 잠시 잊고 계신 건 아닐까?


   언젠가, 유난히도 애착을 가졌던 나의 소중한 ‘가이트 나운’(언젠가 나이트 가운을 잘못 발음하는 바람에 이젠 수녀원 내에선 일상용어처럼 쓰이고 있다)을 단숨에 처리해주신 그분의 기막힌 솜씨는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휴양 차 시골 분원에 가 있는 동안 몇날 며칠을 끙끙 대며 내 손으로 겨우 만든 옷이었다. 비록 안팎을 바꿔 재단하여 여기저기 이어 붙이느라 입으면 자꾸 뒤틀리는 옷일망정 나의 바느질 작품으로는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이 가운을 입을 때마다 혼자 얼마나 흐뭇해하고 대견스러워했던가? 그런데 이 옷을 몇 달도 못 입어보고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내 근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지 피정의 집에서 연중피정을 할 때다. 그런데 같은 방을 쓰는 수녀님의 가운이 아주 멋있어 보였다. ‘아, 내가 만든 가운을 두고 오다니’하고 못내 애석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터였다. 그러나 며칠 뒤, 나의 근무지인 애화학교에 갈 기회가 생겼다. 피정하는 수녀들 모두가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린 한스 큉 신부의 강의를 들으러 가려면 대형버스가 필요한데 애화학교 버스를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옳지, 이때다. 이 차편을 이용해서 가운을 가져와야지.’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수녀원 숙소에 들러 얼른 가운을 보자기에 싸들고 버스를 탓다. 그런데 명동성당 강의실까지 이것을 안고 갈 것은 또 뭔가. 열심히 강의를 들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끝나고 그만 빈손으로 나올 줄이야.


   그러고도 나는 오후 내내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작 가운을 입어야 할 밤이 되어서야 나는 그 귀한(?) 가운을 낮에 강의를 들었던 강당 빈 의자 위에 올려놓고 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부랴부랴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그 보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만히 잘 있는 ‘가이트 나운’을 어이없게도 일부러 갖다 내버린 꼴이 되었으니….


   나는 피정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바로 이 사건이 한없이 높으신 분의 의미심장한 소행(?)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이호자 마지아 수녀(서울 포교 성 베네딕토 수녀회)/ 前 애화학교장

 

                 
                       Love Affair / Ernesto Cortazar

 

                            

                                                       With solitary my wild g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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