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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09-30 조회수582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6년 9월 30일 토요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경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방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마소 교황의 비서로 일한 성인은 구약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한 성서학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주해서를 비롯한 많은 저술을 남긴 그는 420년경 베들레헴에서 선종하였습니다.

 

 “너희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명심해 두어라.

사람의 아들은 멀지 않아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루가 9,44)

 

 “Pay attention to what I am telling you.
The Son of Man is to be handed over to men.”
But they did not understand this saying;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으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

 

 멀리 내다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더 넓고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자들은 그러한 지혜를 군중에게 알려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흘러 자신이 직접 체험한 다음에야 다시 후대에게 그 체험을 전해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여전히 다음 세대는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일이 대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대의 체험을 우리의 체험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보다 훨씬 더 하느님의 뜻에 가까이 있지 않을까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가벼이 보지 않고 귀하게 여기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계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박상대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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