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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하늘로부터 키재기 / 민성기 신부님 (펌)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1 조회수507 추천수3 반대(0) 신고
                          하늘로부터 키재기

 

   어느 날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아테네시의 네거리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한 제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

 "선생님,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뭐 떨어뜨린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 그러자 스승이 그 제자에게 대답하였습니다 :

 "사람을 찾고 있네."

그 제자는 하도 이상해서

"아니 선생님, 사람이라면 여기 저기 이렇게 많지 않습니까?"

 라고 되묻자, 스승은

"저건 모두 사람이 아닐세" 라고 말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 하더랍니다.
   디오게네스는 오늘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대낮에 등불까지 켜들고. 디오게네스가 계속해서 찾아 다니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면, 자신을 잃고 평균적인 인간으로 퇴락된 상태의 인간을 '남' (das man) 이라고 부릅니다.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해야 합니다. 남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야 하고, 남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나도 그렇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여기서 행동하고 있는 것도 내가 아닙니다. '남'입니다. '남'이란 누구도 아닌 인간, 각자의 독자성을 잃어 버린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이 아닌 '나' (der mann)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의식화(conscientiation)란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는 그저 아는 상태, 그냥 앎 (natural awareness)의 상태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니게 되는 앎 즉 비판적인 앎(critical awareness)에로 나아가는 의식의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함으로써 '나'를 찾아가는 과정, 본래의 모습으로서의 나, 내 꼬라지를 찾아가는 의식화를 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남이 아닌 나 즉 잃어 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는 나의 신원인 인간 본질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그것도 등불까지 켜들고 찾아다니던 인간, 우리가 찾고 있는 바로 그 인간은 어떤 꼬라지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인간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소우주라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습니까? 오장육부로 되어 있습니다. 오장육부. 놀부의 몸은 좀 특이하여 심술부리는 게 하나 더 달렸다 하니 오장칠부인 놀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은 오장육부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넓게 확대해 봅시다. 오장육부로 이루어진 한 인간 인간을 모두 모두어 보면 지구가 됩니다. 인간이 모여 살고 있는 커다란 공동체로서 지구는 오대양 육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지구를 더욱 더 확대하면 우주라는 더 큰 공동체가 됩니다. 오장육부로 이루어진 인간 → 오대양 육대주의 지구 →우주. 우주는 희랍말로 '코스모스' (
kosmos ;
영어로는 cosmos)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질서' (秩序)입니다. 이를 거꾸로 소급하여 내려가 봅시다. 그러면 우주→오대양 육대주의 지구→오장육부의 인간으로 소급되어 내려가는 하나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소우주로 즉 '작은 질서'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질서'란 무엇입니까? 동사무소나 구청에 나붙어 있던 현수막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습니다 : '질서란 편한 것, 자유로운 것, 아름다운 것' 이라고.
   우리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리면 짜증스럽습니다. 만사가 귀찮고 불편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왠지 불안하고 마음이 편칠 못합니다. 우리는 편하고 자유로워야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끔 하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우주인 우리 즉 질서지워진 자로서의 우리는 편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빈 종이에다 가운데 줄을 긋고 한쪽 편에는 나로 하여금 불편하게끔 하는 것들(disease)을 다 써 봅시다. 나로 하여금 사람답지 못하게끔 하는 내 마음의 병, 미움, 시기, 질투 등에 대하여, 그리고 그 맞은 편에다 화살표(→)를 그어 앞에 적은 것들과 반대되는 것들(ease)을 하나하나 적어 봅시다. 그렇게 하여 왼쪽 편을 보면 우리 마음의 어두운 면을 볼 수 있고, 오른 편을 보면 우리 마음의 밝은 면 아름다운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 어떤 쪽을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나 자신, 나의 가정, 나의 직장, 나의 액션단체 그리고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 지구 그리고 우주 등으로 확대하여 진단하노라면 각기 그에 맞갖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을 학명(學名)으로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라고 부릅니다. 'HOMO'는 하늘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지상에, 땅에 매여 사는 동물 모두를 일컫습니다. 'SAPIENS'는 '지혜롭다'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따라서 땅에 사는 동물은 동물이되 여느 동물과는 달리 지혜로운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여느 동물과는 다른 차이 즉 종차(種差)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지혜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1985년 여름,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오랑캐가 쳐들어 오자 적은 병력으로는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음을 인지한 남이 장군이 칼로 커다란 바위를 탁 치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착 섰다'라는 전설을 지닌 입암(立岩)이라는 마을에 초대를 받아 3박 4일간 그 마을의 공소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부산교육대학 가톨릭학생회 하계 봉사활동의 여정에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이윽고 내일이면 그 마을을 떠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를 상징하는 불의 예식 후 모두가 한 자루씩의 초를 손에 들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불, 모닥불을 중심으로 각기 흩어져서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초를 건네주면서 "사랑합니다"하고 인사하며 각기 성서구절이나 가훈, 아름다운 싯귀, 이야기, 체험 등을 선물로 들려 줍니다. 그러면 초도 받고 귀한 말씀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초를 상대방에게 건네주면서 앞에서와 똑같이 되풀이하여 선물을 건네줍니다. 한참을 돌고 대화를 주고 받던 중에 한 젊은이가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디모테오라고 불리는 그는 저에게 "수사님, 사랑합니다!" 라고 인사하고는 대뜸 "수사님, 키 한번 재 봅시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키는 겨우 145센티미터였습니다. 당시 나이로 스물다섯 살이었으니 난쟁이라 불러도 틀리지 않을 만큼 작은 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제안에 의아해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니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는 너무 작았으므로 재어보나마나였습니다. 그런데 저랑 키를 재어보자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 남들이 보면 창피하니 그마두자고 저는 마다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완강히 청하기에 할 수 없이 등짝을 맞대고 키를 재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키가 178센티미터이니 얼마나 차이가 났겠습니까? 무려 33센티나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이 저를 또 한번 어리둥절케 했습니다. "수사님, 주의 기도할 줄 아세요?" 아니, 제가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사는데 주의기도를 모를 리 있으리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그는 제게 한번 외워보라고 졸랐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 하고 외웠더니 그는 "됐어요, 수사님. 물론 알고 계시겠지요. 좋아요. 그렇다면 수사님, 주의 기도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시지요?" "하늘이지요"라고 제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는 "그럼 수사님, 우리는 어디에서 살지요?" 하고 다시 물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땅이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살기에 그 기준은 땅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 땅으로부터 키를 재는 동물이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서 사시는 하느님은 어디서부터 키를 재실까요?" "하늘로부터 키를 재시겠지요. 하느님께서 재는 기준은 바로 하늘이며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하시지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 수사님. 그럼 다시 한 번 키를 재 볼까요? 수사님이랑 저랑 누가 더 큰지요?"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할 말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그는 저보다 무려 33센티나 더 커 있었으니까요!


   여름방학이 끝나 다시 서울로 돌아와 혜화동 보나벤뚜라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초가을 9월 17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그 여름 사건을 떠올리며 끄적이다가 아래의 졸시를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

    하늘로부터 키재기

     

    세우려 한다
    세우려 한다
    한없이 세우려 한다

    오르려 한다
    오르려 한다
    한없이 오르려 한다

    재려 한다
    재려 한다
    한없이 재려 한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한없이 세우고
    한없이 오르고
    한없이 재려 한다

    누가 더 높이 쌓았는지
    누가 더 높이 올랐는지
    한없이 쌓고 오르고 재려 한다

    사람은 땅에 사는 동물
    사람은 땅으로부터 높이를 재는 동물이다
    보이는 것의 기준은 땅이기에

    허나 보이지 않는 게 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느님이라 불렀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는 분
    하느님은 하늘로부터 높이를 재는 분이시다

    오늘에야 사람들은 불현듯
    하늘로부터 키재는 법을 알았다
    하늘로부터 키재기를 시작한다

    난쟁이의 키가 커져 보인다
    바벨탑은 낮아지고
    난쟁이의 키는 커졌다

    내리고프다
    무너뜨리고프다

    오, 캐노시스! *
    갑자기 비가 내리고
    세상이 바로 보인다.

                                                      

    ※ 캐노시스 : 어원은 희랍말의 kenosis로서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를 나타내는 의미로 많이 씌어지고 '스스로 낮아짐, 비움'이라는 뜻을 지닌다.

   하늘로부터 키를 재는 지혜, 이러한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은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야고 3, 13-18).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 작아진다는 것, 내가 작아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같아 보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는 그 곳, 바로 그 곳에는 낯설음이 있습니다. 왠지 어색하게 낯설은 그 곳에서 우리는 여느 세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아지기를 어색해 하고 낯설어 하는 것은 세상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그 새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새로움과 낯설음, 바로 여기에 예수께서 육화하시어 우리와 같은 피조물로까지 작아지시고 십자가상에서 수모를 당하시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하셨던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묵시 21, 1)이 자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크게 되는 변화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의 신비입니다(마르 4, 31).
   정현종 선생의 「섬」이라는 단순한 시가 있습니다. 그 전문은 이렇습니다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저는 이 시를 대하면서 시인이 노래하는 이 '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습니다. 이 섬은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곧잘 이런 말을 합니다 :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디오게네스가 찾아 헤매던 사람이나, 정현종 선생이 노래 한 '섬'을 저는 같은 맥락에서 보고 싶습니다. 사람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우리 눈에도 잘 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동경하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섬처럼, 한번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비록 드러나지 않아 우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우리들 가운데, 우리와 함께 분명히 있습니다.


   누구일까?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렵습니다. 참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세상의 상식적인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이 작아지고 또 작아져야 하는데 그것이 쉬울 리 없습니다. 자존심을 뭉그러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 (루가 14, 11 : 18, 14)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낮아지게 됩니다" (마태 18, 4).


   작음, 작아진다는 것, 작아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이며 신앙인에게 없어서는 안될 덕입니다.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의 시간, 나의 공간, 우리의 시간, 우리의 공간을 비우면 비울수록,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면 여길수록, 세상의 눈으로 보아 바보가 되고 어리석어 보이면 보일수록, 하느님의 신비로운 역사, 하늘나라가 이 땅에 내려 오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 작아집시다. 우리가 작아질 때 예수께서 우리 안에 육화 하실 것입니다."

                                      (생활성서 100호 기념 특집호, 1991. 12)

 

 

출처: 고 민요셉신부님 홈피 (http://min0319.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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