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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수혈전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3 조회수743 추천수8 반대(0) 신고
  

 

 

복음: 루카 9,51-56


오늘 복음은 제 논문과 연관이 깊습니다.

저는 요즘 요한복음서에서 사마리아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거든요.

 

사마리아에 대한 관심은

마르코 복음서에는 단 한 줄도 없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사마리아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만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좋은 표양의 예로 활용하고 있지만

그 역시 비유에 불과할 뿐 직접적으로 그들에 대한 구원활동은 벌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남다른 관심과 대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논문의 연구 과제입니다.

매일 사마리아에 대해 골몰하고 있는 요즘

마침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가 등장하니

눈이 번쩍 띄일 수밖에 없지요

 

루카 복음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도중의 기간을

무척 중요하게 다룹니다. (10장에 걸쳐 보도하지요)

그 초입이 바로 오늘 대목입니다.

 

사마리아는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지역으로

그곳을 거쳐 갈릴래아로 가거나 반대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그곳을 피해서 

멀리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해야 했습니다.

 

유다사람들이 그곳을 지나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 영역에 들어갔을 때,  

가끔 뜻하지 않은 유혈사태가 벌어지곤 하였기 때문이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인들을 보면 강도 짓도 서슴치않았던가봅니다.

 

유다인 편에서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참 나쁜 사람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렇게 된 연유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또 있었던 거지요.

(우린 늘 유다인 편에서 쓰여진 성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실은 아주 옛날 옛날 구약 시대 때부터의 원한이

서로서로에게 뼈에 사뭇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옛날의 사연들을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번 논문을 준비하며,

잘 알려진 기원전 8세기의 북 이스라엘의 멸망 시기나

6세기의 유다인들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

성전 건립 때의 충돌 사건 말고도

그 이후로, 지속적인 반목과 충돌의 역사는

지루할 정도로 끝이 없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답니다.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의 聖山인 그리짐산에 세워진 그들의 성전을 파괴한 사건이라든지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기 위해 성전에 죽은 사람의 뼈를 뿌린 사건이라든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보다 더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랍비들의 규정이라든지

모두 물고 물리는 혈투의 역사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다인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지요. 

아예 근처에도 서로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역을 피해가는 우회로를 택하지 않으시고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기꺼이 큰 마음을 열어놓으셨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들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우리도 그런 일이 있지요.

기껏 선의로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해주었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오히려 거절당했을 때의 기분.

아니면 전면 부정의 태도에 맞딱드렸을 때의 어이없음.

 

저도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기껏 누굴 위해서 일을 했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에 흡족치 않았다고, 또는 다른 일로 해서 화가 났다고

원천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거부해버리고

오히려 원망과 곡해 투성이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할 말이 없겠습니까?

제 좁은 맘 같아서는 억울함을 해명하고,

실추된 제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번, 두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마음을 접었습니다.

 

예수님께 여쭈어보면 언제나 답은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똑같이

아니 그보다 더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은 그 마음을 나무라십니다.

 

점잖은 나무람이 아니라 단호하게 꾸짓으셨습니다.

마귀에게 물러가라고 명령하셨던 바로 그 꾸지람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시때때로 복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를 해명할 수 있을까 하는

일견 정당한 사유같아 보이는 그 이유 안에

어떻게 하면 똑같이 그에게도 제가 받은 그 상처 그대로를 선사할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아프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가 그렇게 나를 아프게 하려고 작정한 이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오해를 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만천하에 터뜨려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을만큼 그도 아팠다는 말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나는 별 거 아니라 생각하고 한 말.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행동도.

어쩌면 그에게는 돌팔매와 같은 행동, 비수와 같은 말이었을거라고.

 

그렇다면 기다리렵니다. 잠자코 .

 

고의든, 본의가 아니든,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또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더욱 몸가짐 근신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징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자들을 나무라신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굳이 들어가지 않으시고

우회하셔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십니다.

 

저도 그렇게 하렵니다.

굳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주제넘은 시도도 하지 않고

자꾸 마음쓰며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언젠가는 제 맘을 알아줄 날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는다 해도 할 수는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마음에 자꾸 다가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그렇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참는 것.

그것이 하늘에 올라가는 길인가 봅니다.

 

자기를 버리고 수난과 고통의 길을 가시는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일,

그것이 하늘에 올라가는 길이라네요.

하늘에 올라갈 때가 바로 그 같은 일을 당할 때라네요.

 

 

 

오늘의 영성체 후 묵상도

계속 제 마음에 어른거립니다.

 

사람들은 서운한 일을 당하면 보복을 바랍니다.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로 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보복하면 상대편은 다시 복수하게 됩니다.
이런 악순환은 계속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은 그 이상으로
보복하지 않도록 동태 복수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을 것이지
당한 것 이상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법으로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만이 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푸대접한 마을에 하늘의
불벼락으로 보복하고자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처벌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신 까닭입니다.
언제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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