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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 예수 종합병원 무료검진 ^^*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3 조회수456 추천수6 반대(0) 신고
         십자가상의 칠언(七言)을 묵상하는 예수 종합병원
 




  

 

  십자가를 안테나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신 7가지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영적종합검진을 받아봅시다. 이른바 '예수병원 종합검진'인데 7가지 진료과목을 노병규님이 올리신 <자료들-그림, 글>를 활용하여 만들어보았습니다. 늘 좋은 글과 자료를 올려주시는 노병규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일곱 번 말씀하셨다. 이 말씀들을 주님의 최후의 칠언이라고 한다. 성서에는 세 사람의 유언만 실려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모세와 스테파노의 유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세사람만큼 의미깊고 대표적인 다른 유언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첫 번째 사람이고, 모세는 율법체제의 첫 사람이었고, 스테파노는 첫 번째 그리스도교 순교자였다. 각 사람의 유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역사에 있어서 숭고한 어떤 것을 시작한다. 베드로나 바오로나 요한의 유언마저 인류의 유산이 되지 못했다. 어떤 사람도 그들의 유언의 비밀을 밝혀주려고 기록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아주 신비스러운 순간에 죽어가는 사람의 정신상태에 대해 몹시 듣고 싶어한다.
   착하신 주님께서는 돌아가실 때 유언을 남겨주셨다. 주님은 이스라엘이나 모세나 스테파노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으로 온 인류의 대표자시기 때문이다. 이 장엄한 시간에 주님은 당신 자녀들을 모두 십자가 강단으로 불러 모으시며, 그들에게 하신 한 마디 한 마디는 영원히 기록에 남고 꺼지지 않는 위로가 되도록 글로 씌어졌다. 죽어가는 그리스도와 같은 설교가는 일찍이 없었으며, 십자가 설교에 주변에 모여 든 회중과 같은 회중도 일찍이 없었다. 또한 십자가상 마지막 칠언과 같은 설교도 일찍이 없었다.>

 

   1. 용서과 : 지난 3월 1일은 삼일절이었습니다. 애국지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 만세!가 있습니다. 이 만세는 다름아닌 용서입니다. 하느님나라 독립만세를 외치다 돌아가신 예수님의 만세 즉 용서를 우리도 이어받고 실천합시다.

  <첫 번째 말씀>
   사형집행인들은 그리스도가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십자가 형틀에 못박힐 때는 누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날과 사형집행인들과 어머니를 저주했으며 심지어는 자기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침을 뱉었다고 세네카는 기록하였다. 치체로는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들의 독설을 막기위해 그들의 혀를 잘라야 할 때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사형 집행인들은 독설을 들을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상시에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라" 고 설교하던 그리스도가 손 발이 못에 뚫리는 고통을 당하면 그가 외친 복음을 다 잊어 버릴거라고 그들은 확신했다. 무참한 고통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가 체면상 지키려했던 결심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모두가 고통의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십자가 밑에 있는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는 바로 그 도끼를 향기로 감싸주는 향내나는 나무처럼, 생명의 나무에 달려 있는 위대한 마음은 그 깊은 곳으로부터 고통의 단말마가 아닌 기도 - 부드럽고 달콤하며 차분한 용서의 기도 -를 토해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루가 23, 34)
   누구를 용서한단 말인가? 원수를 용서한단 말인가? 가야파의 마당에서 억센 주먹으로 주님을 친 병사를 말하는가? 카이사르와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하느님을 단죄한 정치가 빌라도일까? 지혜에게 바보의 옷을 입힌 헤로데일까? 하늘과 땅을 가로지른 나무에 왕중에 왕을 매단 병사들일까? 이들을 용서한단 말인가? 이들을 왜 용서한단 말인가?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고 계속 했더라면, 만일 자기들이 생명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를 알았더라면,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보다도 바라빠를 선택한 것이 얼마나 왜곡된 정의였는지를 알았더라면, 만일 그들이 끝없는 언덕을 걸어다니던 발을 모아 나무 기둥에 못박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았더라면, 만일 그들이 흘리게 한 바로 그 피가 그들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며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면서도 계속했다면 그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범한 엄청난 죄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 구원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무지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관들을 비난하거나 죄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완벽한 결백이신 이 분은 용서를 청하시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용서를 베푸셨다. 희생제물로 당신을 봉헌하신 대사제로서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해 탄원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용서라는 말은 두 번 언급되고 있다. 한 번은 에덴 동산에서, 악의 뱀을 쳐부술 "여인의 자식"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셨을 때이고,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종의 모습으로 약속을 성취하신 지금이다. 십자가상 첫 번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위대하여 역사를 통해 계속 메아리친다. 스테파노는 주님께 자기에게 돌을 던진 자들의 죄를 묻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으며, 바오로는 이렇게 썼다.
       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에 한 사람도 나를 도와 주지 않고 모두가 버리고 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간 그들이 엄한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Ⅱ디모테오 4, 16)
   그러나 스테파노와 바오로의 기도는 용서와 당신 희생이 일치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당신 몸소 사제이시며 희생물이시기 때문에 주님은 사제로서 바로 서계시며 희생물로서 엎드려 계신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탄원하시며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다. 아벨의 피는 카인의 살인 죄를 복수해달라고 하느님의 천벌을 외쳐댔지만 카인 족속의 시기심 많은 형제들에 의해 흘려진 새로운 아벨의 피는 진노를 거두고 용서를 청하기 위해 들어 올려졌다.


 
2. 포용과: 우리는 그 누구도 남을 판단하고 처벌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처벌할 권한이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함께 달린 죄수 중 우도를 진정으로 형제로 받아주시고 함께 낙원에 들거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말씀>
   최후의 심판이 갈바리아 산에서 예시되고 있다. 재판관이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고 양편으로 인류가 둘로 갈라져 있다. 즉 구원받은 자와 멸망한 자, 양과 염소로 갈라진다. 주님께서 인류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 중에 오실 때에도 십자가는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며 그 때는 수치가 아니라 명예의 표시가 될 것이다.
   주님의 양편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두 도둑들은 처음에는 불경스런 말을 하고 저주하였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면 꼭 더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구속적인 가치를 이해함으로써 정화되지 않는다면 고통은 영혼을 마비시키고 태워 버릴  수 있다. 영성화되지 않은 고통은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다. 왼쪽에 있는 도둑은 고통을 당한다고 조금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왼쪽의 도둑은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오른쪽의 도둑은 구세주의 사제로서의 탄원기도를 듣고 감동되어 자기도 데리고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 형제 도둑이 신을 모독하는 것을 꾸짖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루가 23, 40-41)
   그리고 나서는 자신을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며 용서를 청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루가 23, 42)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영생을 부탁한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왕국을 부탁한다. 죽음의 문턱에 선 도둑처럼 죽으면서 천국을 훔치고자 한다. 아마 사람들은 갈바리아 산의 계산대에서 구원이라는 붉은 주화로 첫 번째 구입된 영혼은 성인일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느님의 계획으로는 왕중의 왕을 천국으로 모셔드리는 호위병은 도둑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단순히 교사로 오셨더라면 도둑은 결코 용서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의 부탁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 영혼을 구하는 것 - 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즉시 대답을 들었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 가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루가 23, 43)
   이것이 그 도둑의 마지막 기도이자 첫 기도였을 것이다. 그는 단 한번 문을 두드렸고 단 한번 찾았고 단 한번 부탁했으며 감히 모든 것을 요구했다가 모든 것을 찾았다. 제자들마저 의심을 품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만이 십자가 밑에 있었는데, 도둑이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인정하였다. 만일 바라빠가 이 형장에 왔더라면 자기도 풀려나지 않고 자비심 많은 이 대사제의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주님의 마음과 혀만 빼고 그리스도의 온 몸은 못으로 박혀 있으며 채찍과 가시로 고문을 받았다. 바로 이 마음과 혀가 그날 용서를 선언했다. 그러나 하느님 외에 누가 용서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영원히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 누가 천국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3.효도과: 얼마 전에 미국의 한 맹인부부가 한국의 중증 시각장애자 4명을 입양하여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께 "어머니,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성모님은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가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성모님과 우리의 이웃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잘 모셔야겠습니다.
 
   <세 번째 말씀>
   십자가상에서 주님의 세 번째 말씀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던 것과 똑같은 말을 담고 있다. 어머니가 당황하는 주인을 위해 손님들에게 줄 술이 없다고 간단한 기도를 하자 주님은 "여인이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항상 당신 수난과 죽음에 대해 "때"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우리들의 말로 풀어본다면 가나에서 주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의 부탁은 나에게 나의 신성을 선포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로 세상에 나타나 나의 일과 기적으로 나의 신성을 입증하라는 말씀이란걸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이 일을 하자마자 나는 십자가로 나가는 왕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들 사이에 알려진다면 그것은 갈바리아 산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때를 앞당기기를 바라십니까? 내가 십자가를 향해 나가기를 진정 바라십니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의 관계는 달라집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어머니십니다. 당신은 이 조그만 마을 어디서나 예수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구세주로 나타나 구원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당신의 역할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일단 내가 인류를 구원하게 되면 당신은 나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내가 구원한 모든 사람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인류의 머리입니다. 내가 인류 전체를 구하자마자 머리의 어머니신 당신께서는 또한 나의 신비체 즉 교회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보편적인 어머니가 되실 것이며, 내가 새로운 아담인 것처럼 새로운 이브가 될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당신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나는 당신에게 전세계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내가 사탄에게 너와 여인 사이에, 너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를 맺어 주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당신을 말한 것입니다. 바로 그 여인의 후손이 납니다. 나는 이제 위대한 여인이라는 칭호를 당신에게 부여하여 기립니다. 나의 때가 왔을 때, 상처입은 독수리처럼 내가 십자가 위에 양팔이 펼쳐진 채 매달려 있을 때 당신에게 다시 이 칭호를 부여하여 기릴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구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 것은 곧 내 것입니다. 이 시간부터 우리는 마리아와 예수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이요, 새로운 하와로써, 새로운 인류를 출발시키며 죄의 물을 생명의 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제가 십자가를 앞당기고 갈바리아 산에 가기를 바라십니까?"
   주님께서는 마리아에게 기적을 요구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마리아가 자신을 죽음으로 내보내고자 하는지 묻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의 신성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며, 당신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면 언젠가 포도주가 피로 변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 후 삼년이 흘렀다. 이제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십자가에서 내려다보신다. 즉 요한과 당신 어머니시다. 주님은 가나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취하시어 결혼잔치 때 그녀에게 주었던 똑같은 칭호로 어머니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어머니를 "여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두 번째의 수태고지였다. 먼지 가득한 눈과 가시관을 쓴 머리를 움직이며 주님은 기꺼이 당신을 십자가에 보내시고 이제 십자가 밑에 구원의 협력자로 서 계시는 어머니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인이여, 이는 당신 아들입니다." 주님은 그를 요한이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만일 요한이라고 부르셨더라면 그는 제베데오의 아들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익명으로 불렀기 때문에 요한은 온 인류를 대표한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사람이 너의 어머니시다."
   마침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머니께서 "첫 아이"를 구유에 뉘이셨다고 하는 복음서의 육화라는 신비로운 표현에 대해 답변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첫 아이라는 이 표현은 마리아께서 또 다른 자식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시요, 구세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의한 다른 자녀들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구유에서 가나까지의 기간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가나에서 십자가까지의 기간이다. 첫 단계에서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셨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 마리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되시기 시작한다. 즉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가나까지는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있듯이 마리아는 예수를 데리고 있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마치 늘상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친밀하게 "아들아" 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삼십년 동안 마리아와 함께 있었으며, 어려서는 마리아의 팔에 안겨 에집트로 피난갔으며, 나자렛에서 살았으며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것이었으며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잔치집에 들어갔을 때에는 마리아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가나 이후로 사이가 점점 벌어지며 마리아는 몸소 그렇게 되도록 도와주었다. 가나 잔치 이후 일년이 지났을 때 마리아는 독실한 어머니로서 예수의 전교를 따라 다녔다. 어머니가 자기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주님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시며 군중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셨다. (마태오 12, 48)
   그때 그리스도의 인간의 관계가 혈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 신성과 일치하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는 위대한 그리스도교적인 신비를 밝혀 주시며 주님께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2, 50)
   이러한 신비는 갈바리아 산에서 끝이 난다. 갈바리아 산에서 마리아는 자신의 신적인 아들을 잃는 순간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겉으로는 애정이 소원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깊어진 것이다. 그 어느 사랑도 더 낮은 차원에 대해 죽지 않고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마리아는 가나에서 예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죽었다가 갈바리아 산에서 주님께서 구원한 주님의 신비체와 더불어 예수를 되찾았다. 인류를 얻기 위해 당신 아들을 버린다는 것은 우선 당장 밑지는 거래이지만 실제로는 마리아는 주님을 버리고 인류를 얻은 것이 아니다. 가나의 잔치날 마리아가 전교하는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신적인 모성과 온 인류의 새로운 모성을 결합시키기 시작하셨으며, 갈바리아 산에서는 당신이 인류를 사랑하시듯 마리아도 인류를 사랑하게 하셨다.
   그것은 널리 인류 전체에게 미치는 새로운 사랑이자 동일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에는 고통이 있었다. 인류를 아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리아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마굿간에서 기쁨을 느끼며 예수를 낳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갈바리아 산에서만 낳으실 수 있었으며 그 해산의 고통이 하도 커서 그녀를 순교자들의 여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을 때 마리아가 말한 Fiat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이제 또 다른 Fiat 이 되어 그녀는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낳게 된다. 또한 이 Fiat 은 그녀의 애정을 확대시켜준 만큼 그녀의 고통을 증가시켜 주었다. 하와가 받은 혹독한 저주 - 여인이 고통스럽게 자식을 낳는다는 것 - 가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자궁이 열리는 고통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실현되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인 것이다. 첫 번째 아기를 낳을 때에는 여관에 방이 없었지만, 마리아가 두 번째 출산할 때는 전 세계가 방이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실 때 그를 요한이라고 부르시지 않은 점을 상기하라. 그렇게 하셨더라면, 요한은 제베데오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요한을 통해 온 인류가 마리아에게 맡겨졌으며 마리아는 비유나 언어적인 표현이 아니라 출산의 고통을 통해서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다. 주님께서 요한을 당신 어머니에게 주신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염려가 아니었다. 요한의 어머니가 십자가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어머니가 필요없었다. 이 말씀의 취지는 영적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볼 수 있게 되고 활동하기 시작하게된 오순절에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구원되고 새롭게 태어난 인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가 사도들 가운데 계셨다.



  4. 소외과 : 아프리카에서 가장 사나운 동물은 사자, 호랑이가 아닌 임팔라라는 사슴이라고 합니다. 평소 순하디 순한 이 사슴이 자신이 왕따당했다고 즉 소외되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서 물, 불을 안 가리고 뿔로 쳐박는다고 합니다. 이때는 사자도 이 사슴을 피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의 대구 지하철 방화범도 이런 극도의 소외감에서 그런 끔찍한 짓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 영화배우는 우울증으로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런 소외감을 겪으셨지만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가지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십니다.
 
  <네 번째 말씀>
   열 두시부터 세시까지 신비로운 어두움이 땅을 뒤덮었다. 자연도 창조주께 동정을 느껴 신을 죽이는 범죄에 빛을 비춰주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빛에 사형선고를 내린 인류는 바로 그 빛의 우주적 상징인 태양을 잃어 버렸다. 주님께서 자정에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에서는 갑자기 하늘이 빛으로 충만하였으며, 대낮에 십자가형의 치욕을 받으신 갈바리아 산에서는 하늘이 빛을 잃었다. 수세기 전 아모스예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날이 와서 대낮에 해가 꺼지고 백주로 땅이 캄캄해지거든, 모두 내가 한 일인줄 알아라. 주 야훼의 말씀이시다. (아모스 8, 9)
   주님께서는 두 번째 단계의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파멸에 이어 십자가형을 받는 수난이 뒤따른다. 피가 자유스럽게 흐를 수 없는 곳에 피가 엉겨있으며, 몸 전체에 열이 나며, 땅을 저주하는 가시가 죄를 저주하며 흘러나온 피로 덮여있다. 어둠 속에서는 당연한 신비로운 고요함이 한 낮의 비정상적인 어둠 속에서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유다가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러 무리와 함께 왔을 때 주님께서는 지금이 당신 때요, "어둠의 세력"이 힘을 과시하는 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움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을 비춰주는 빛을 없애신다는 뜻만이 아니라 당분간 주님께서 당신 신성의 빛과 위로를 스스로 부인하시고 있다는 뜻이기도하다. 이제 고통은 육체에서 정신과 영혼으로 옮아가면서 주님께서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셨다.
       세 시쯤 되어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뜻이다. (마태오 27, 46)
   십자가 처형이 이만큼 진행되는 동안 주님께서는 천년 전에 쓰이긴 했지만 예언적으로 당신을 가리키고 있는 다윗의 시편을 되풀이해 말씀하셨다.
       야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시편 21, 13)
   이 시편에 나타나 있는 주님의 고통의 두드러진 특징은 외로움과 고독이었다. 성자께서는 아버지를 "나의 하느님" 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 인간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와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이러한 외침은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분리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오히려 산꼭대기에는 햇빛이 가려질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스스로 세상의 죄를 지심으로써 아버지의 얼굴과 신적인 모든 위로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셨다. 죄는 육체적인 결과를 낳는데 주님께서는 손과 발이 못에 뚫리는 고통을 통해 그것을 참아 받으셨다. 죄는 정신적인 결과를 낳는데 주님은 게쎄마니 동산에서 이러한 결과를 보여주셨다. 또한 죄는 영적인 결과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버림받는 느낌과 하느님으로부터 격리된 느낌, 고독감 같은 것이다. 바로 이 특별한 순간에 주님께서는 죄의 주된 결과인 버림받은 느낌을 스스로 당하고자 하셨다.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했는데 바로 주님은 그렇게 배척을 받는게 어떤 것인지 느끼고자 하신다. 인간이 하느님을 등지고 떠났는데, 이제 인성과 위격적으로 하나가 되신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치 죄인인양 이 엄청난 고통을 당신의 인성을 통해 느끼고자 하셨다. 땅은 주님의 십자가를 높이 세움으로써 이미 주님을 버렸고, 하늘은 어둠으로 자신을 감춤으로써 이미 주님을 버렸다. 그러나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계신 주님께서는 이 둘을 결합시키셨다. 그러한 외침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정서들이 신적인 향수를 나타내고 있다. 즉 무신론자와 회의주의자, 덕을 미워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죄인들, 그리고 육적인 사랑밖에 없는 모든 사람들의 고독감이 그러한 외침 속에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다는 것은 지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이 순간 주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의 이름으로 못에 의지하여 지옥의 벼랑 끝에 서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죄의 극형인 하느님으로부터 격리되는 벌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주님의 눈은 어둠으로 싸여 있고 주님의 영혼은 고독으로 싸여 있다.
   각 말씀마다 주님께서는 신적인 중재자의 역할을 하신다. 첫 번째 말씀에서는 모든 죄인들의 용서를 탄원하셨으며, 두 번째 말씀으로는 이 세상 마지막 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려내게될 최후의 임무를 앞당겨 실시하신 것이다. 세 번째 말슴으로는 영적인 포성을 구원받은 인류에게 부여해 주는 중재자리 역할을 하셨다. 이제 네 번째 말씀에서 주님은 죄많은 인류를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하신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서로 등지고 계신다. 구약성서는 예언하기를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다. 어둠은 이러한 지독한 저주를 나타내지만 주님께서는 이 저주를 참아 받으시고 부활로 승리하심으로 이 저주를 제거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는 빛의 선물이었다. 주님께서 의로운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다 이 빛을 비춰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텅비고 어두운 죄많은 영혼들을 위한 간구자요, 중재자로서 주님께서는 빛이라는 원시적 선물을 스스로 거부하셨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역사는 빛이 창조된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역사는 최후의 심판 때 끝날 것이다. 그 때 태양과 달은 어두워질 것이며 별들도 빛을 발하지 않을 것이며 온 하늘이 캄캄해질 것이다. 바로 이 특별한 대낮에 주님께서는 창조된 빛과 악이 처벌을 받게 될 궁극적인 암흑 사이에 서 계신다. 주님께서는 자신 속에서 역사의 긴장을 체험하신다. 즉 빛이 어둠 속에 오셨으나 어둠이 빛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임종하는 사람이 가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털어 보듯이 주님께서는 죄의 어둠이 순간적인 승리를 구가할 때 자신 앞에 요약된 모든 역사를 보신다. 구약 사제들이 그 위에 손을 얹어 죄를 뒤집어 씌운채 광야로 내쫓았던 희생양이 바로 지옥문까지 내려가신 주님 안에서 실증되었다. 악은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해주는 모든 끈을 끊어 버렸으며, 주님께 나아가는 힘을 줄 수 있는 모든 수로를 봉쇄해 버렸다. 이제 주님은 인간의 생명을 신적인 생명과 결합시켜주는 줄을 스스로 끊어 버리신 것처럼 느끼셨다. 십자가 처형을 받은 육체적인 고통은 주님께서 받으신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들도 십자가를 만들 수 있지만 죄만이 영혼을 어둡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외침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느끼셨던 버림받음에 대한 절규였지만 절망의 절규는 아니었다. 절망하는 영혼은 결코 하느님께 부르짖지 않는다. 굶주림의 통렬한 고통은 완전히 기운이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못느끼고 젖먹던 힘까지 다하여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느끼듯이,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신을 믿지 않는 자나 죄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분 즉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도 느끼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과 많은 정신질환의 이유는 정신과 영혼과 마음에 하느님이 안 계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함은 주님께서 직접 이러한 고독을 체험하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순간부터 고독을 느끼는 어떤 무신론자도 그리스도는 하느님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도 직접 체험하신 죄로 인한 공허한 인간성을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절망이 아니라 태양이 다시 떠올라 어둠을 물리칠거라는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5.갈증과 : 인체의 수분이 2%부족할 때 사람들이 가장 갈증을 느낀다고 해서 2%라는 음료수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 즉 '잃어버린 한 마리양'을 찾아나서시는 분이기에 야곱의 우물에서 방탕하고 문란한 삶을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십자가에 함께 달린 죄인들이 듣는 곳에서 '목마르다'라고 하셨습니다. '돈마르다'가 아니라...
 
   <다섯 번째 말씀>
   십자가상 칠언 가운데 이전의 말씀들은 다른 사람들에 관한 것들인 반면에 지금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말씀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물론 고통을 통해서 피를 많이 흘리셨고 손과 발에 극심한 긴장을 가져오는 몸의 부자연스러운 자세, 지나치게 펼쳐진 근육, 공기에 노출된 상처, 가시관으로 인한 머리의 고통, 혈관의 팽창, 이 모든 것들이 신체적인 갈증을 일으켰을 것이 분명하다. 주님께서 갈증을 느끼신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것이 놀랍다. 별들을 궤도에 올려 놓으시고 천체를 우주속에 지정해주신 분, 문짝들로 바다를 막으신 분, 모세가 두들긴 바위에서 물이 솟아 나오게 하신 분, 모든 바다와 강과 샘을 만드신 분,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하신 그분께서 십자가상 칠언 가운데 가장 짧은 말씀을 내뱉으신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요한 19, 28)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주님께서는 마시라고 준 마취약을 마시지 않았다. 이제는 애타게 마실 물을 찾고 계신다. 그러나 두 가지 음료수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는 몰약으로 고통을 못느끼게 만드는 마비약이다. 주님은 감각이 마비되지 않도록 몰약을 마시지 않았다. 지금 주님께 드린 음료는 식초나 병사들이 마시는 맛이 신 저질 포도주였다.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요한 19, 29)
   가나에서 물을 술로 변하게 하신 주님께서는 똑같이 무한한 자원을 이용하여 당신의 갈증을 풀으실 수도 있었겠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왜 주님께서는 마실 물을 찾으셨을까? 물론 대단히 목이 마르셨겠지만 꼭 마실 물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물을 찾으신 진짜 이유는 예언의 성취였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요한 19-28)
   주님에 대해 구약성서가 예언한 모든 것들은 극히 사소한 사항까지도 실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윗은 성서를 통해 주님께서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 느끼실 갈증을 예언했다.
       하느님께서 원수들의 머리를 부수시고, 악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 그들의 더부룩한 골통을 바수신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바산에서 데려 오리라. 바다 밑바닥에서 끌어 올리리라. 그 때에 너는 원수들의 피로 발을 적시고 너의 집 개는 그 피를 핥으리라" (시편 68, 21-22)
   병사들은 주님께 성서에 명백히 기록된 대로 조롱삼아 식초를 드렸지만 성서말씀을 실현시켰다. 한 다발의 히솝 풀대에 적셔 식초를 주님께 드렸는데 히솝의 길이는 150㎝쯤 자라는 식물이다. 이 히솝은 파스카양의 피에 적시기도 하였고 또 에집트에서 유대인들은 복수의 천사를 피하기 위해 이 히솝을 가지고 문설주에다 피를 뿌렸으며 나병환자를 고쳐줄 때에도 새의 피에 히솝을 적셔 사용하였으며, 다윗 자신도 죄를 지은 후에 히솝으로 정화되어 깨끗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하찮게 생각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의식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당하고 죽으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분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도록 하기 위해 성서의 세부사항을 모두 성취하실 때까지 당신 생명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약속된 메시아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죽음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성서에서 받아들이신다. 주님께서 목마르신 것은 지쳤기 때문이 아니듯이 주님께서는 기운이 다하셔서 죽으셔서는 안되었다. 주님께서 목마르다고 외치신 것은 대사제요, 중재자인 주님께 대한 예언 때문이었다. 사실 유대 랍비들은 이 예언을 그리스도께 적용하였다. 미드라쉬는 이렇게 말한다. "와서 주의 수난과 고통의 식초에 - 이는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다 - 그대의 고통을 적셔라. 이사야 예언자가 쓴대로 '그는 우리 잘못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우리 악행 때문에 멍이 드셨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조롱삼아 히솝의 끝에 식초를 적셔 주님께 드린 것은 아마도 그들이 고의적으로 성스러운 유대예식 중 하나를 웃음거리로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히솝으로 양의 피를 뿌렸을 때의 상징을 통한 정화가 이제는 히솝이 그리스도의 피에 닿을 때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숙고하면서 성바오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 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9, 12-14)
   이렇게 해서 십자가 밑에 서있는 사람들 가운데 구약성서의 예언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고통받는 메시아라는 또 하나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주님의 영혼의 고통을 말해주는 네 번째 말씀과 육체의 고통을 나타내는 다섯 번째 말씀은 모두 예언된 것이다. 갈증이란 만족을 모르는 죄의 특징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영혼의 기쁨을 희생하며 얻은 육체의 쾌락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비유를 보면 지옥에 있는 부자가 갈증이 나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라자로에게 말해서 물 한방울로 혀를 좀 적시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죄를 완벽하게 속죄하기 위하여 구세주께서는 잃어 버린 자들의 갈증까지도 미리 느끼셔야 하셨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에게 이러한 갈증은 영혼을 갈망하는 갈증이다. 어떤 사람은 금전욕이 있고 어떤 사람은 명예욕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영혼을 위한 열정뿐이다. "마실물을 달라" 는 말은 따라서 "영혼을 달라" 라는 뜻이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비극은 주님께서 목마르실 때 사람들은 주님께 식초와 쓸개를 드렸다는 것이다.



   
6. 결승과: 사도 바오로는 "나는 달릴 길을 다 달렸고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분명히 어떤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보다 나의 뜻(금전, 권력, 명예 등...)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또 때로는 나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예수님께서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뜻을 잘 식별하고 그 뜻을 이루며 살아갑시다.
 
  <여섯 번째 말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당신 영원한 아들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자 하였다. 당신 아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아담을 만드신 후 하느님은 그를 정원에 두셨다. 하느님 홀로 정원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법을 알고 계시기에 그 정원은 아름다웠다. 알 수 없게도 루치펠의 반항이 땅에까지 파급되었으며,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이제 천상 아버지께서는 타락한 인간이 원래 닮도록 된 아름다운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당신 자비를 통해 인간을 본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시키고자 바라셨다. 하느님은 단순히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정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당신 신적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훌륭한 구원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타락하는데 협조했던 세가지 요소가 그대로 구원하는데도 기여하고 있다. 순종하지 않은 인간 아담 대신에 순종하는 아담 그리스도가 계시며, 교만한 여인 하와 대신에 겸손한 새로운 하와이신 동정녀 마리아가 계시며, 에덴 동산의 나무 대신에 십자가 나무가 있다. 하느님의 계획을 회고하시고 예언을 성취한 식초를 맛보신 후, 주님은 원어(原語)로는 한 단어로 되어 있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며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 30)
   비록 인자의 치욕이 이제 끝나긴 했지만, 이 말씀은 당신의 고통이 끝나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세 번 이와 똑같은 말을 사용하셨다. 첫 번째는 창세기에서 창조가 완성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묵시록에서 모든 피조물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를 나타내면서 사용되고 있다. 시작과 마무리된 종말의 두 극단 사이에서 십자가상 여섯 번째 말씀이 이들을 연결해주고 있다. 주님은 치욕의 극치 속에서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모든 예시된 것들이 실현되었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 것을 보시고 "마쳤다" 라고 기쁨의 탄성을 지르신 것이다. 이제 구원 사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생명께서는 성화사업을 시작하실 수 있게 됐다. 창조시 칠일째 되는 날 하늘과 땅이 다 이루어진 후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 이제 교사로서 가르치셨고, 왕으로서 통치하셨으며, 사제로서 성화시키셨던 십자가상 구세주께서는 휴식을 취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또 다른 구세주는 없을 것이며, 새로운 구원의 길도 없을 것이고, 하늘 아래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을 것이다. 인간은 값을 치루고 구원되었다. 새 다윗의 악의 골리앗을 베기 위해 일어서셨으며 다섯 개의 돌멩이가 아니라 다섯 상처로 - 양 손과 양 발과 옆구리에 나 있는 추한 다섯 상처 - 이기셨다. 한 낮의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갑옷이 아니라 뼈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갈가리 찢긴 몸을 가지고 전쟁이 치뤄졌다.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걸작품에 마지막 일필을 가하셨으며, 강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완수하셨기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셨다. 비둘기로부터 성전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통해 성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영원한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마무리지으셨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언으로써 - 아들을 희생으로 바쳤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삼 일동안 고래 배 속에 있었던 요나에 이르기까지 - 주님을 통해 성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리라는 즈가리야의 예언, 친한 사람 한 사람에 의해 배반당하리라는 다윗의 예언, 은전 삼십 냥에 팔리시고 그 돈은 나중에 피의 밭을 사는데 사용될 거라는 즈가리야의 예언, 포악한 대접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며 사형에 처해질거라는 이사야의 예언, 두 악인 가운데 십자가형 벌을 받으시며,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리라는 이사야의 예언, 주님께 마시라고 식초를 드리고 그 옷을 서로 나눠 가지며, 모세와 같은 예언자, 멜기세덱과 같은 사제, 학살당한 어린양, 도시 밖으로 쫓겨나는 희생양이 되실 것이며, 솔로몬보다 더 현명하고 다윗보다 더 왕다운 분이 되실 것이며, 예언을 통해 아브라함과 모세가 고대하던 그분이 되실거라는 다윗의 예언 등, 이 모든 훌륭한 상징적 표현들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제물로 봉헌되는 모든 양과 염소와 송아지를 뒤돌아 보시며 "마쳤다" 라고 하시지 않았더라면 전혀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 일이 완성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훌륭한 산상설교를 말씀하신 후가 아니었다. 주님께서는 가르치러 오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많은 사람의 죄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주님은 사도들에게 당신이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조롱을 받고 침뱉음을 받고 채찍을 맞으며,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칼을 뺐던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천상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아야 되겠느냐고 물으셨다. 십이 세가 되셨을 때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처음으로 입을 여시면서 당신은 아버지의 일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이 다 이루어졌다. 아버지께는 죄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아들을 보내셨으며, 영원한 성령에 의해 마리아의 태내에 잉태되셨다.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고통을 당하시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삼위일체가 모두 참여하셨다. 베드로 자신이 성령을 받고나서 십자가를 이해한 후 말한 것처럼, 주님에 의해 성취된 것은 구원이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 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Ⅰ베드로 1, 18-19)
  

 
7. 의탁과: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 당신 품에 안기기 전에는 영원한 안식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가장 힘이 들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다가도 우리를 안고 가십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나의 몸과 맘을 주님께 봉헌합시다.
 
  <일곱 번째 말씀>
  원죄의 결과로 인간이 받은 벌중에 하나는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것이었다. 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은 아들 아벨의 축늘어진 모습을 발견하였다. 아담이 불렀으나 아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머리를 일으켜 세웠으나 힘없이 뒤로 젖혀졌다. 그의 눈은 냉랭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아담은 죽음이 죄의 벌이라는 것을 기억했다. 이것이 세상의 첫 죽음이었다. 카인의 족속에 의해 살해된 새 아벨 그리스도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신다. 여섯 번째 말씀은 지상을 향한 것이었지만 일곱 번째 말씀은 하느님을 향한 것이다. 여섯 번째 말씀은 시간에 대한 작별인사였고, 일곱 번째 말씀은 영광의 시작이었다. 탕자가 이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삼십 삼년 전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이 세상이라는 낯선 땅에 들어 오셨다.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질인 신적인 풍부한 능력과 지혜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으며, 당신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살과 피의 실체는 죄인들 사이에서 소모되었다. 이제 볼거라곤 겉껍데기와 조롱과 인간의 배은망덕한 식초밖에 아무것도 없다. 이제 주님은 자신 안에 들어가시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리시며 완전한 기도를 올리신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루가 23, 46)
   보통 사람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하듯이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이 기도를 바치시지는 않았다. 주님은 벌써 아무도 당신 목숨을 빼앗아가지 못하며 당신 스스로 목숨을 바치신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이 주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이 세상을 떠나라고 명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기력이 다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죽으셨음을 보여주기 위해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했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태오 27, 50)
   이것은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가 되는 역사상 유일한 예다, 주님의 작별인사는 다윗의 시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마음 편히 지내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이제는 절대로 안심이다. 하였는데 나를 어여삐 여기시고 산 위에 든든히 세워 주시던 야훼께서 얼굴을 돌리셨을 때에는 두렵기만 하였사옵니다. 야훼여, 이 몸은 당신께 부르짖었고, 당신께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이 몸이 피를 흘린다 해서 이 몸이 땅 속에 묻힌다 해서 당신께 좋을 일이 무엇이겠사옵니까? 티끌들이 당신을 찬미할 수 있으리이까? 당신의 미쁘심을 알릴 수 있으리이까?" (시편 30, 6-9)
   주님은 자신에게 죽음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생명에 계속적인 전진을 선포하신 것이다. 주님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음이 인간에 대한 봉사요,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죽음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서는 죽어가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기쁨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은 그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의 생활이 미래를 결정한다. 그가 한 몇 가지 선택과 그의 수중에 있는 기회와 그가 받아들이거나 거부한 은총이 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다. 삶의 위험은 죽음의 위험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주님께서 죽음에 대해 기쁨을 느끼고 천상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게된 것은 인간을 몸값을 주고 사신 주의 생활태도였다. 어떤 행성들은 자기들을 내보내신 주님께 인사를 드리듯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야 저 궤도를 다 마치듯이, 육화한 말씀은 지상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구원사업을 이행하도록 파견하신 천상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신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 때 예루살렘의 반대쪽 언덕에서는 수천 마리의 양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양들은 제단 위에서 하느님 대전에 그 피를 봉헌하고 백성들이 그 살을 먹을 수 있도록 성전 바깥 마당에서 살해되고 있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바로 같은 날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고, 희생물로 바치기 위해 이사악을 산으로 데리고 갔으며,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아브라함에게 바쳤고, 에사오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 먹었다는 랍비의 가르침이 얼마나 진실된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어린 양이 살해된 이 날 모든 예언은 성취되었다. 구원 사업이 마무리된 것이다. 사랑의 희열 속에 심장이 파열되었다. 이제 인자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꺼이 돌아가셨다.
            주: 이글은 2005년 3월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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