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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나라는 아무나 가나? / 최시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4 조회수721 추천수7 반대(0) 신고

 지난 8월 연례피정 중 어느 날, 미사 복음에서 들었던 예수님 말씀이 계속 마음에 여운을 일으키고 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다. 자녀들이 훌륭한 분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그분을 본받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제자들은 그들을 나무랐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당신께로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시며 “사실 하늘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 (마태 19, 13-15) 예수님의 이 말씀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하늘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면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심오한 영적 통찰이나 이것을 얻기 위한 고도의 수련이 필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아가 영웅적인 자기희생이나 극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며 반드시 오랜 기간의 신앙생활이나 깊은 연륜의 수도생활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것들에 있지 않고 아주 단순한 어린이의 마음과 삶에 있다는 말씀이 아주 놀랍게 다가왔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나 자신 스스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아주 어려운 일로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예수님 말씀은 이것이 아주 쉽다는 사실을 더 이상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으로 들려왔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런 것을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다면 과연 우리 중 누가 그리고 몇 사람이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을까?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를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으며, 사랑을 누가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데 생각할 시간이 많이 필요치는 않았다. 결국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무심결에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하늘나라와 사랑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군...”  그러나 곧 나의 이 말마저도 지금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심결에 나온 이 말은 아직도 사랑을 어렵게 생각하는 나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약해지는 것이 두렵고,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며, 또한 사랑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손해 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니 어떻게 하늘나라를 향한 발걸음을 뗄 수 있었으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발걸음이 떨어질 수 있었겠는가?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디선가 얼핏 들은 적이 있는 유행가이다. 정확한 노랫말은 기억나지 않으나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신다. 사실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야만 하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께서 아주 공평 하게 그리고 아주 세심하게 배려하신 것 가운데 이보다 더 한 것이 있을까? 어린이들마저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늘나라와 사랑을 쉽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 사람의 종교, 피부색, 가문, 직업, 재능, 학식, 건강, 지위, 재력, 미모, 나이, 장애여부 등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리고 얼마나 많은 상처가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등과도 무관하게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건 우리 모두 누구나 초대 받고 갈 수 있는 곳인 것이다.(참조; 마태 22, 1-14; 혼인잔치의 비유)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해 추호의 의심이 없으셨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거부해서 갈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할 수 있겠으나, 가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못 간다면 그것은 하늘나라가 아닐 것이다.



  “...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르 10, 13-16). 우리가 간직해야 할 어린이다움은 무엇이며 우리가 그만두어야 할 어린이 짓은 무엇일까?(참조: 1 고린 13, 11-13). 간직해야 할 어린이다움은 잃어버리고, 그만두어야 할 어린이 짓은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상처받고 약해짐을 두려워하고 손해 보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아이가(혹은 어린이다움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아이의 손을 놓아버렸는지 모른다. 손을 계속 잡고 있으면 또 상처받게 되고 약함이 드러나고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는 그 아이의 손을 놓아버리고 그 아이를 버렸는지 모르나 그 아이는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다시 상처받고 버림받아 자신의 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이의 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다보니 바로 그 아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렇게 우리 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마음, 그 고사리 손, 그 발걸음... 그 아이는 바로 육화하신 예수님이었다. 우리는 이 가을에 우리가 놓아버렸다고 생각하였던 그 아이의 손을 느껴보아야 한다. 우리 손의 감각이 마비되었을 뿐이지 그 아이는 끝까지 한 시도 우리의 손을 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손을 조용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 손을 꼭 잡고 있는 그 아이의 손길이 느껴질 때까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처럼 넉넉하게 우리 손이 그 아이 손으로 가득해 지기를 빕니다.

 

                                                                                    <예수회 홈 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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