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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선포는 모험을 필요로 한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4 조회수651 추천수3 반대(0) 신고

<복음 선포는 모험을 필요로 한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가 9,57-6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는 그 사람 됨됨이를 익히 아셨기에 그들이 부족했지만 아무 조건을 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려고 스스로 덤벼드는 세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각 사람들의 사정에 알맞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 가르침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제자로 받아드리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각자가 지닌 인간적인 한계를 훤히 꿰뚫고 계셨기에 그런 비유로 제자가 되어 따르는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다잡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처신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루가 저자도 생략했습니다. 바로 미래의 제자인 우리에게 질문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표현은 우울한 감정이 아닙니다. 뻥 뚫린 허전한 마음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집의 크기, 화려함, 장소, 편리함, 같이 거처하는 식솔들 문제 등등에 구애 받지 않고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는 곳이 바로 내 쉴 곳이며, 거처할 장소라는 말입니다.


  요즘에도 노숙자들이 역이나 지하철 계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어도 많은 사람들이 곧 뛰쳐나온다고 합니다. 문전걸식으로 끼니를 마련했던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들이 어떤 점이 다른가요? 그들에게는 삶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왜 자신을 절제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기도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모든 인간적 약점을 지닌 채 누구라도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리보 또르또의 빈 오두막에서 너무 좁아서 제대로 앉거나 쉴 수도 없는 가운데 구걸해온 순무조각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수많은 형제들과 끼니를 굶으면서도 매일매일 형제들을 사랑으로 살폈고, 악을 극복하고 육의 충동을 누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헛간에서 천국에 오르기가 궁전에서 천국에 오르기보다 더 빠를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기쁨을 온 천하에 전하지 못해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 형제들은 외견 상 노숙자와 다름 없어도 끝없는 기쁨을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였습니다. 그 차이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당신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하였듯이 프란치스코도 “가서 나의 집을 지어라. 나의 집은 거의 다 무너져 가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서 자신에 관해서나 그 반대급부에 계산하지 않고 뛰어드는 모험을 강행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가난뱅이가 되었고 비천한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 선포에는 인간적인 헤아림보다는 비합리적인 투신을 요청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인간의 구원자’에서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사람으로 하여금 계산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몸을 던지게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돌아보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의 가난함입니다.”라고 쓰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자신의 가난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 앞에 꺼내 보일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자신이 가난한 자라고 느낀 사람은 남들이 무엇이라 말하고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오로지 주님에게만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해방은 두려움이 사라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은총입니다. 이 내적해방을 맛본 자는  오늘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것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을 압니다. 제 아버지의 장례도, 가족과 나누는 작별 인사도 더 이상 주님을 따르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갖가지 핑계를 대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소홀히 하고, 제자가 되는 것을 어렵다고 여겨 당연히 포기하는 그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집과 재산과 가족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우선하려는 마음을 지닐 때 우리는 더 쉽게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이 서로 뒤 바뀌는 셈입니다. 자기의 집과 재산과 가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믿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제 생각과 다른 경우가 되면 여지없이 냉담하거나 배교하고 맙니다. 오로지 하느님 찬양만이 목적이 될 때라야 나머지를 두려움 없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아버지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여 핍박하고 감금하여도 자기가 받은 부르심을 더 큰 보물로 여겼기에 주교 앞에서 발가벗고 하느님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 미친 자가 되었기에 모든 유산과 보장된 부유를 부끄럽게 여기며 헌 신짝처럼 내 팽겨 쳐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만이 이처럼 미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만이 모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어리석기만 인간에게 자유로이 선택하게 만드시는 모험을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참된 온전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 하신 모험이 옳았다는 것을 예수님과 성 프란치스코께서  증거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모험을 감행하셨습니다. 그 모험이 성공하리라고 확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 모험에 발들여 놓는 것에 두려워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모험하는 자만이 영광을 얻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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