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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선교임무의 핵심: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5 조회수676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6년 10월 5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루가 10,5-6)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If a peaceful person lives there,
your peace will rest on him;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지명하시어,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를 전하도록 둘씩 파견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일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4,43). 예수님께서는 이 사명을 열두 제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셨다”(루카 9,2).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일꾼이 모자란다는 것을 아시고 다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시고는 똑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사명입니다.

 

 

선교임무의 핵심: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가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가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가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가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가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루가 9,1-6)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성사(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 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을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연대(連帶)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떤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싸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인(義人) 열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선포는 그저 이리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집행과 말씀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작금(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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