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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 복음묵상] 선교의 참된 기쁨 / 박상대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7 조회수636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6년 10월 7일 토요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571년 10월 7일 주일, 당시 레판토 해전에서 소수의 그리스도교 군인들이 그들보다 훨씬 강한 터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이 의외의 승리는 성모님의 중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때문이라고 여기고, 이를 기념하고자 1572년 비오 5세 교황은 10월 7일을 ‘승리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듬해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묵주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도미니코회를 비롯한 묵주기도의 형제회에 10월 첫째 주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한편 스페인의 여왕 안나 마리아는 레판토 해전 승리 100주년을 맞이하여 클레멘스 10세 교황에게서 스페인 제국에서 묵주기도의 축일을 지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이 축일을 서방 교회 전체에 확대하였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로마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묵주기도의 축일이었던 10월 첫째 주일과 승리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기념일을 10월 7일에 함께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1967년 터키를 방문하여, 레판토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탈취한 회교도의 국기를 되돌려 주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기념하는 대상이 ‘전쟁의 무기’가 아니라 ‘평화의 신비를 낳으신 분’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였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Blessed are the eyes that see what you see.
For I say to you,
many prophets and kings desired to see what you see,
but did not see it,
and to hear what you hear, but did not hear it.”


 

 

 

 예수님께서는 기뻐하며 돌아온 일흔두 제자와 함께 기뻐하시며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 요즈음 세상입니다. 악인들이 자주 승승장구 출세하는 듯이 보입니다. 고통은 그 사람의 잘못을 알려 주는 하나의 표징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의 신비처럼. 고통은 잘못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더 큰 상을 위한 시련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욥의 고통처럼. 고통을 겪어 낸 위대한 인물들에게서 한결같이 볼 수 있듯이, 고통은 분명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합니다.

 


 

                         선교의 참된 기쁨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가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無知)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罪)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認識)과 지식(知識)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박상대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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