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고발자, 변호인, 재판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07 조회수639 추천수4 반대(0) 신고
 


욥기: 42,1-3.5-6.12-17


고통도 고통도 욥만한 고통이 있을까?
인생의 밑바닥을 헤매던 욥의 고통도 드디어 끝이 났다. 

주림과 갈증과 질병보다 더한 주위 사람들의 몰이해.

사랑하는 자녀들은 모두 죽고,
평생 근면과 성실로 저축해놓은 재산은 날아갔다. 
일심 동체였던 아내는 침을 뱉고 떠났으며  
마음을 나누던 친한 친구들마저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등을 돌렸다.

인생의 무상함과 서러움, 분노와 슬픔을 쏟아낼 곳은 오직 한곳.
일생을 의탁했던 하느님 한분.
그런 그분마저도 긴긴 침묵 속에 계셨다.

재판관이신 하느님의 부재.
변호인의 상실.
주변에는 오로지 고발자들 뿐이다.

욥의 진짜 고통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하소연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욥을 믿어주지 않았고, 아무도 욥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셨다.
드디어 하느님이 입을 열어 답변하셨다.  

아니 답변이라기 보다 오히려 욥을 몰아 세우고 닥달하고 질문을 퍼부우시고 꾸짓으셨다.

욥은 입이 있어도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코너로 몰려 찍소리 못하고 쥐죽은 듯이 있었지만
드디어 오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하느님께 포복하고 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서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하느님은 온갖 불의를 보고도 침묵을 지키시는 무능한 분.
하느님은 온갖 비난에도 수수방관하시는 무력한 분이라고 
마음 속으로 목청을 높였었던 욥이다.

"당신에 대해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의 재판관이신 하느님
욥의 변호인이신 하느님

욥은 자신만만했었다.
평생 의롭게 살아왔던 만큼.
자신의 처지를 올바르게 변호해주고, 
자신을 올바르게 판결해줄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라고.

그러나 하느님은 욥의 재판관이기도 하고 변호인이기도 하지만
올바른 고발자이시기도 하셨다.

그분이 바로 그의 교만을 고발하셨다.
포효하는 사자와 같이.
그분이 바로 그의 영혼의 심연을 뒤흔드셨다. 
천둥처럼, 폭풍우 처럼.

...................

그분이 침묵을 깨뜨리고 다가오시자
귀동냥으로 쌓은 그동안의 지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욥은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분 앞에 엎드려 욥은 바라본다.
자신의 교만함과 부당함을.
그분의 현존과 전능함을.

욥은 비로소 깨달았다.
먼지와 같은 자신의 존재. 
잿더미와 같은 생의 허무.

그 텅텅 빈 공간에 비로소 그분이 들어오시고
그분이 들어오시니 빈 영혼은 가득찼고
가득찬 영혼은 그분의 전능을 알아보았다.

그분이 욥의 고발하신 이유는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 똑바로 알아보고
하느님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욥은 행복했고, 그것만으로도 욥은 충만했다.

...........................


피고 욥의 항소는 원래 여기서 끝이 나야한다.
지금의 욥기는 원래 두 부분으로 따로 나뉘어지며, 
작가도 각각 다른 별개의 작품이 한데 합쳐졌다.

즉 이야기식(산문체)의 한편과 시 형식(운문)의 한편이 한데 합쳐지면서
이야기식의 욥기의 중간에 시 형식의 욥의 노래가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원래의 모습대로 분리해서 보면 저자의 의도를 보다 선명히 알 수 있다.

산문체 형식의 욥의 이야기는 
서막인 1-2장 다음에 42-7-17의 결말이 바로 와야 올바른 순서이다.

이것은 기원전 10-9세기 경의 어떤 작가에 의한 작품으로 
온갖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사는 욥이라는 인물과, 
그 욥에게 내려지는 현세적 보상이 그 주제다. 

그러나 중간에 삽입된 운문의 욥의 노래는 주제가 다르다.
5세기 초엽에서 중엽, 또는 4-3세기에 이르는 훨씬 후대의 작품으로
그 안에는 후대 역사의 현실 체험들이 담겨져있다.

즉 성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을 
하느님은 보상은 커녕 시련과 고통 속에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 같더라는 체험 말이다.
그러니까 고대의 순진한 현실적 인과응보의 지혜에서
현실적 인과응보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진일보한 신학적 반성이 들어있는 것이다.

................................

오늘날도 욥의 현실 체험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리떼가 넘실대는 세상.
현실 적응에 부적당한 양들은 모두 도태되거나 잡아먹히고 있다. 

욥의 호소와 투정, 분노와 한탄은 모두 그런 양들의 탄식을 대표하고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재하신 하느님.
무능하고 무력한 하느님이실 뿐이다.

하늘을 향해서밖에 달리 하소연할 곳이 없는 양들.
올바른 재판관이 되어 달라고, 
속시원한 변호인이 되어 달라고.

그러나 때때로 그분은 도리어 고발자가 되어 
양들의 교만과 무력함을 꾸짖기만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도대체가 기댈 데가 없고,
도대체가 믿을 곳이 없다.

다시 오늘 욥의 결말을 보자.
욥의 결말은 고대의 산문을 끌어와서까지 현실적 보상을 보장한다.
(오늘 독서는 운문의 결말과 산문의 결말을 합쳐놓은 것이다.)

아마도 최후의 편집자는 5세기 초 중엽의 운문에서의 결말이 미지근했었나 보다.
자신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전능을 깨닫고 다시 그분께 의탁하는 정신적, 영적 행복 뿐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보상까지 해주시는 분이라는 강력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나보다. ^^
 
......................

그렇다. 
오늘 더 많은 세월이 흐르고 더 거친 세상이 되었다.
이리 보다 무섭고 사자보다 잔인한 인간 강도 떼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회복시킬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겸손되이 주님의 능력을 믿고 충실히 살아가는 
가난하고 순박한 착한 양들에게 내려지는 주님의 보상.
그 고대의 욥의 결말은 정말 고무적이다.

욥은 그 옛날 하느님이 내려주셨던 축복보다 
"갑절로...." 받았으며,
"지난 날보다 더 큰 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다. 
(난 이 고대의 결말이 훨씬 더 맘에 든다. ㅎㅎ ) 

..................

만일 오늘 우리에게 고대의 결말 같지 않은 상황이 연속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렇다면 우리도 욥처럼 하소연하고 투정부리고 고발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깨지고 조용해지고 참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 탄원해보자.
그리고 그분이 내려주시는 현실적 은총도 지속해서 빌어보자.

욥기에서 들은 귀동냥으로도 그분을 미리 단정짓지 말고
직접 그분께 항소해보자.
그분을 고발하고, 심판하더라도 함부로 변호인으로 나서지는 말자.

누가 그런 처지에 놓였거든 현실적 보상은 안주신다며 지레 포기하길 종용하지 말자.
기복신앙은 나쁜 것이라고 미리 선입견을 갖게 하지도 말자.
하느님께 보상을 받는 것도, 보상이 없어 실망하는 것도,
모두 하느님 체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고통과 시련 중에 있는 친구에게 
점잖은 척 하느님을 변론하고 옹호하던 욥의 친구들은 
오히려 하느님께 질책을 받았다.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의 넓은 뜻을 알아 변호하며,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을 모두 아는 것처럼 대변한다는 말인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친구를 고발하며 하느님을 변호하려했던 그들을 위해
하느님은 거꾸로 욥을 중재자로 내세우신다.
그들의 변호인으로 내세우시는것이다.

욥기에서는 이렇게 변호인, 고발자, 심판관이 오락가락 그 자리를 뒤바꾼다.
이는 또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고 자주 우리는 상황에 따라 역할 바꾸기를 한다.
나는 오늘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 지난날이여 안녕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