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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7 > 주방과의 전쟁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0 조회수1,016 추천수11 반대(0) 신고

                                   

 

 

 

                           주방과의 전쟁


   내가 1962년도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아버지께서는 한 달 먼저 사범학교 체육교사에서 다시 초등학교 교장으로 나가시게 되었는데 그곳이 충남 당진군 석문면에 있는 삼봉초등학교였다. 그리고 바로 그 학교에 ‘대난지도’라는 섬마을 분교가 있는 것을 알고는 나도 그 학교로 지원하였다.


   그래서 같은 학교에서 아버지는 교장으로 계셨고 비록 섬마을 분교이긴 했지만 아들인 나는 평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집안이 어려운 시기라 나는 선생이면서도 소두 여섯 말짜리 하숙을 할 수가 있었다. 겨우 쌀 두 말짜리 자취를 하는데 반찬이라야 마가린 한 갑에 일본 간장 한 병이 전부였다.


   그래도 재수가 좋은 날에는 멸치 종류의 잔고기를 약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을 말린 다음에 잘게 부숴서 마가린과 간장에 섞어 밥을 비벼 먹을 때의 맛이란, 김치가 없어도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 이었다. 그때는 돌을 삼켜도 삭는 나이 였다.


   그런데 가끔 육지에 나가 교장이신 아버지의 하숙집에 가 보면 그 진짓상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입맛이 없다고 진지를 잘 드시지 못했는데, 왜 좋은 음식을 놓고 입맛이 없다고 하시는지 나는 그 이유를 잘 몰랐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는 마흔이셨고 나는 스물이었다.


   그 후로 나는 또 다른 섬에서도 자취를 했는데 반찬은 항상 두 가지였으며 나는 그 두 가지로도 세상에 다시없는 성찬을 즐기곤 했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두 끼만 굶으면 한국 간장 하나만 가지고도 누구나 기막힌 식사를 할 수 있는데 굳이 반찬을 십여 가지 장만하는 이유를 나는 사실 잘 모른다.


   신부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자취를 하다가 도저히 시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주방에 아줌마를 두게 되었는데 원래 혼자 해먹던 습관 때문인지 마음에 안 드는(?)아줌마들이 많았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솜씨도 좋고 마음씨도 착하곤 했지만 그러나 사는 스타일이 다르니까 이를테면 궁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리고 도시 본당에 있을 때는 거의 외식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일이란 꼭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분위기에 따라서 갈비집도 가야 했고 횟집에도 가곤 했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내겐 참으로 고역이었다. 좌우간 나는 먹는 것이 아주 단순하게 길들여진 사람이다.


   도시에 비하면 소록도는 참으로 내가 살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다. 마치 옛날(?) 섬마을 선생 할 때의 그 추억과 경험이 어우러져서 가난하면서도 풍요로운 세상을 살 수 있는 분위기가 항상 갖춰져 있다. 그리고 텃밭이 있어서 상추나 쑥갓 등 온갖 채소를 손수 가꿔먹을 수 있으니 먹는 즐거움이 커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어려울 때의 습성 때문인지 나는 밥상에 반찬이 여러 개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굉장한 거부감을 느낀다. 도대체 그 많은 반찬이 왜 필요한지 식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또 반찬이 많고 보니 본래의 맛이 훨씬 떨어지게 된다.


   사제관의 주방 아주머니가 바뀐 지는 1년이 좀 넘는다. 처음엔 젊은 며느리가 하다가 홀로 되신 그 시어머니가 이어서 하는데 사람의 성품도 좋고 아무래도 어른이시라 음식 맛도 깔끔하여 나무랄 것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반찬 수가 좀 많다는 것이 약간의 흠이다.


   본래 사제관에는 식구들이 많다. 손님 신부님이 항상 계시며 또 신학생들이 버글거리고 또 내가 키우는 아이들이 때가 되면 몰려와서 법석을 부리니 서너 가지 반찬으로는 도저히 부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가 내가 아무리 반찬 수를 줄이라고 해도 아주머니는 듣는 둥, 마는둥이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라는 말은 줄곧 하지만 그러나 항상 그대로였으며 일부러 반찬값도 적게 주면서 절대로 네 가지 이상은 놓지 말라고 엄포를 놓지만 그래도 반찬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별별 이유를 붙여서 항상 예닐곱은 되는데 반찬 때문에 착한 사람들과 계속 싸운다는 것도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루는 마음을 오지게 먹고 “아주머니, 나는 항상 혼자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머니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반찬을 곡 네가지만 놓든지 아니면 아예 보따리를 싸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하며 마지막 선언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반찬 네 가지가 아주 잘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손님 신부님만 아니라면 나는 다시 반찬 수를 셋으로 줄일 것이다. 깍두기 하나만으로도 세상에 다시없는 성찬을 즐길 수 있는 것이 가난의 축복이 아닌가.


   “예수님, 솔직히 밥해 먹을 자신은 없습니다!”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소록도에서온 편지)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T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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