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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의 기도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1 조회수641 추천수5 반대(0) 신고

 

 

<주의 기도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루가 11,1-4)


  어느 사진작가가 전시회를 열었는데 사람들의 뒷모습들을 죽 찍어 놓았습니다. 걸어가는 모습도, 식사하는 모습도, 정겹게 이야기 하는 모습도 뒷모습만 담았습니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인물 사진이 왜 모두 뒷모습이야? 앞모습도 담아 낼 게 많은데 하고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작가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것에만 신경을 써요. 마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한 적도 없었다는 듯이 잊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뒷 구멍은 열심히 캐죠.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항상 대화하면서 사셨습니다. 처음에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스승님께서 무얼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평소에 자신들이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평소에 다른 유다인들처럼  소리쳐 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중얼거리듯 입술만 움직이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실 때도 있었고, 침묵으로 고요하게 계실 때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인지 몰랐지만 점차로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자 요한은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아침저녁으로 바치던 기도문과 회당 예배에서 암송하던 카디쉬와 전혀 다른 새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에세네파들도 그들 나름대로 고유한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제자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자기들도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기도문을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남들과 식별할 수 있게  고유한 기도문을 청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만의 고유한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너무 거룩하고, 힘 있고, 높으시며 인간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분이라고 여겨, 입에다 이름을 담지조차 못하던 주님(YHWH)이신 하느님을 아빠(ABBA)라 친근하게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님(YHWH)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그 아들 될 수 있는 자격을 제자들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여태껏 눈으로 볼 수 없다고 여기고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사실상 외면하고  지냈던 그 하느님을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아빠이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점이 바로 예수님만이 가르쳐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저자와 달리 루카 저자는 아버지를 뜻하는 그리스어 pater 앞에 아무 수식어를 달지 않았습니다. 아빠가 어느 한 곳에만 계시지 않고 이 세상 온 우주 어디서나 계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와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6에서 이렇게 적습니다.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아빠와 자녀 관계”가 이렇게 “주의 기도”를 통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 테레사 성인은 오직 이 “아버지”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우리가 바치는 그 어떤 기도보다 뛰어나며,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루카 본문에는 먼저, 감추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아버지께서 우리 가운데 주권을 드러내 보이시라고 비는 두개의 ‘당신-간구’가 나옵니다.

 

  이 두 간구는 하느님의 약속과 자비하심을 믿는 신뢰의 기도입니다. 온갖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악과 어둠에 둘러싸인 가운데 자신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내 맡기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카디쉬와는 달리 주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구원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루카저자가 말하는 두개의 ‘우리-간구’중,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첫 번째 간구는 내일의 빵 즉 구원의 빵, 생명의 빵을 오늘 주십사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종말에 이루어질 식탁에 우리 모두가 빠지지 않고 참여할 수있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간구는 우리가 죄를 지었으며 또 그 죄과에 얽혀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오직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죄 선언만이  우리들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이 무죄 선언을 비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용서보다 우리의 용서가 선행하는 것처럼 쓰여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을 아람어를 적용해보면 그 뜻이 분명해집니다. ‘용서하다’라는 헬라어 동사 aphekamen 은 아람어 동사 shebaqnan 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아람어 동사의 용법은  우리말에도 없고, 그리스어 어법에도 없는 “동시적 완료형”동사로 입니다. 동사가 일으키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아람어 뉘앙스로 해석하면  “우리도 이로써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를 용서하시고”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행위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람어 특유의 표현법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될 몫인 용서를 스스로 상기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이행하려는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간구는 단순히 일상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달라는 기원이기보다는 마지막 시험에서 믿음을 잃지 않게 해달라는 종말론적 기도 성격입니다.


 이렇게 주의 기도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나라와 미구에 완성될 종말을 바라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자 했던 기쁜소식 즉 복음을 요약한 것입니다.

 

Mozart 대관식missa K.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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