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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도가 어려워지는 이유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2 조회수970 추천수7 반대(0) 신고

 

<기도는 의지행위입니다.>  - 기도가 어려워지는 이유

  

  우리는 기도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자주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느님과 대화가 잘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어느 날 갑자기 두꺼운 벽이 느껴질 때가 있고, 자식들과 모처럼 한 자리에 앉았지만 새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어느 날은 기도 중에 커다란 은총을 느끼기도 하지만, 곧 아무 맛도 없고 건조하여 온통 분심만 가득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또 다시 기도의 맛을 느끼고 싶지만, 그 상태에서 빠져 나오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아무리 기도를 오래 실천하고 있었고, 기도의 깊이가 어느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한번 기도의 어둔 밤에 빠진다면, 막상 모든 기도를 지속하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온통 나를 훼방하는 것만 생겨나는 것 같아서 특별히 기도 시간을 만들기도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를 찾아가 영적 지도를 해달라고 청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우리 평신도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면 수개월간 기도 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억지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도, 온 몸은 여기저기 쑤시기만 합니다. 정신은 산란하여 온갖 망상과 분심에 휩싸입니다. 오히려 기도를 안 하느니만 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 자체를 포기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함정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가요? 우리 스스로 이 어둔 밤에서 헤쳐 나올 수 있는가요? 아니면 누구를 찾아가서 상담해야 하는가요? 우리가 이런 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경우  우리는 급작스럽게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 타인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데, 그 원인을 찾아내면  치유책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들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자기 속셈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태도를 교묘하게 숨기고 살아갑니다. 관계의 지속과 변화, 이 두 가지 상반된 욕망이 혼재합니다. 때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하는지 본인도 헷갈립니다. 한편으로는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을 갈구하다가도, 또 금세 지루함을 느껴 새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 중에도 이런 모순적 행동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을 느낍니다.

  이런 면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넘겨 버릴 수 도 있겠지만, 인간의 지성은 이제 이런 것을 개개인의 단점으로 또는 인간 공통의 특성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악마의 유혹이라고 치부하면 대책을 구하기 오히려 어렵습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더 손쉽습니다. 기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곤란을 남에게만 돌릴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계단을 한걸음 씩 내 딛기 위해서 결국 발걸음을 떼는 것은 우리가 아닌가요? 그러기에 기도는 인간의 행위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의지행위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생활의 교훈을 인간 사회에서 얻습니다.


  우리가 남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모두 하느님과 관계 속에서도 겪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살펴보면 왜 기도가 원할 하게 이루어 지지 않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들에게 지배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적 자유가 없어질까 염려합니다. 남들에게 이용당했던 쓰라린 기억은 우리를 폐쇄시킵니다. 이런 공포를 지니고서 살다 보니 하느님과 관계에서 조차 두려워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나를 無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원죄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점에도 교묘한 속임수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한 인격을 없애지 않고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인간들은 여간해서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계에서 이런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고, 그 자유를 보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경험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고백하는데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중적 모습이 드러날까, 죄스런 모습이 드러날까, 자신의 유치한 모습이 드러날까, 무시당할까 염려하여 자신을 감추어 버립니다. 솔직한 고백이 언제 비수가 되어 자신의 등을 찌를지 몰라 두려워하게 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많은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꺼려합니다. 아니 명백히 표현하길 꺼려합니다. 얼버무리고 맙니다. 그분께서 모든 것을 아실 텐데 하며 굳이 낱낱이 진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는 숨겨 버립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처럼 숨어 버립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것을 두고  “인간의 敵은 이 간계와 유혹이 비밀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비밀이 간직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또 다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죄를 숨겨 버릇하면 자기 죄에 점점 관대한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죄가 더 이상 죄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약점이나 죄스런 감정을 감춘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때 교묘한 악마는 우리에게 창피한 감정을 일으키거나 기도는 엄숙해야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우리에게 비밀을 간직하도록 꼬드깁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이런 죄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반복해서 빠지는 우를 범하게 만듭니다. 악마가 유혹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기도는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주절대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쫑알대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쫑알거리는 것을 잊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던가요?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솔직한 기도를 낯 두꺼운 엄숙주의로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절댄 만큼 그 만큼의  시간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데 써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화입니다.

  이때 우리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상처 입은 마음이 헤쳐 나와 치유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대화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쌍방향으로 움직이는 힘과 에너지의 흐름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의 기적들 중 몇몇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안셀름 그린’ 신부는 말합니다. “치유의 기적이란 억압된 무의식에 숨겨진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쌍방향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혼자만의 기도인데 무슨 말은 못할 것인가요? 기복신앙! 사실 그것도 어느 면에선 필요합니다. 창피한 것이 아닙니다. 무의식의 껍질을 두르고 꽁꽁 숨겨진 것을, 너무 오래 되어 곰팡이 슨 것을 햇볕에 드러내고,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이 나만을 위한 청원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과 가족을 위한 염려와 기도 속에서 우리의 상처도 자연스럽게 치유 된다는 것이 현대 영성의 가르침입니다.


  논어 술이편 37장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子路와 대화에서 자로는 스승의 질병을 염려하여 스승님께 기도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질병 치유를 위한 기도는 필요 없다. 그러나 천지신명(上下神祗)에게 기도한지는 오래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공자는 생활 자체가 기도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에게 닥친 한 때의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자체가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성령께서 내 대신 탄식해 주신다는 것을 안다면(로마8,26)  솔직하게 자신의 바램을 주절대는 것이라도 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추는 것이 죄입니다.


  셋째로 접근해오는 것에서 도망하고자 하는 갈등입니다.

우리는 가끔 깊은 기도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체험한 심오하고 위안이 되는 기도가 자신에게는 너무 벅차다고 느껴 그것에 저항하는 이중적 태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전능하시고 영원무궁하시며 변함없으신 분으로 모시나 그러나 냉정한 분으로  만들어 버리는 태도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입견을 가지고 울타리를 쌓은 다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에 눈과 귀를 닫아 버리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며 기도는 감사의 기도만 해야 된다고 정해 놓고 그 외의 사실엔 눈을 감아버리려 하는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해 분노와 질투와 원망과 性的인 감정을 표현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감정이 일어나면 몹시 저항합니다. 자신이 죄 중에 있다는 것을 감추기에 급급해서, 마치 자기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양 처신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분노와 질투와 원망이 올라오고, 성적 흥분이 올라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에게서 죄가 드러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요? 그저 치유해 달라고, 도와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넷째로 핑계를 대어 본질을 감추려는 경향입니다.

인간들은 서로 핑계를 대기 때문에 대화는 다음 단계로 진전되지 못하고 겉돌고 맙니다. 핑계는 대개 外的인 것으로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숨기려할 때 나타납니다. ‘언제 한번 술자리 갖자는 인사’는 실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핑계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 핑계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다 아십니다. 그저 주님 앞에 다가가 앉아야 합니다.


   다섯째, 익숙한 것에 의존하려는 경향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일이나 체계가 갖고 있는 장점을 포용하지 못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외면했던 것이 오히려 여러 가지로 탈 없고 유익했던 경험을 통해 서로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맙니다. 인간사에서 이해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생겨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인종과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다양성은 우리에게 자신을 되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항상 옳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초심을 잃고 맙니다. 그 초심을 다잡는 데 외부에서  주는 자극처럼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기도 방법을 시도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교육을 받으러 청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기도 방법을 실행해 봐야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우리의 결점은 우리가 기도를 수행하는데 방해를 줍니다. 이러한 결점을 잘 살펴서 우리가 자주 빠지는 결점을 인식하고 미리 대비해야 합니다. 기도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자.

  주님의 지배를 두려워하자 말자.

  우리 힘만으로는 제대로 된 방향을 놓치고 만다.

  결국 옳은 길을 놓치게 만들 뿐 아닌가!


  기도는 결국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모든 것을 드러내며 자신의 힘이 부족한 것을 고백하여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에서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매달리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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