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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30 > “어떤 불우이웃(?)” / 강길웅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6-10-13 조회수906 추천수9 반대(0) 신고

 

 

                      “어떤 불우이웃(?)”

 

                                                     


   나는 7남매 중에 둘째였으며 형님이 위로 한 분 있고 밑으로 동생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조산되어 죽은 세 동생까지 합치면 모두 10남매였다. 그런데 내 바로 밑의 ‘길봉’ 이라는 남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2년이 넘는데도 청소년 시절엔 서로 비슷해서 사람들이 우리 형제를 잘 분간을 못했다.


   그 시절만 해도 나는 철이 없어서 가출을 많이 했었다. 갈핏하면 일 주일이고 열흘이고 집을 뛰쳐나가곤 했는데 어느 땐 한 달 이상이나 집에 안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가출은 내가 했는데, 그때 마다 ‘그놈이 아직도 속을 못 차린다’ 고 욕을 뒤집어 쓰는 쪽은 항상 동생이었다.


   한번은 가출을 한 뒤 며칠을 헤메다가 저녁에 불쑥 외갓집에 찾아 갔는데 그때 외할머니께서 반갑게 맞아 주시면서 뜻밖에도 내 동생 길봉이 걱정을 태산같이 하셨다.

   “길봉이 그놈이 또 집을 나갔다며?”


   그것은 정말 사실이 왜곡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말씀을 솔직하게 정정해 드리거나 또는 사건의 진실을 용기있게 고백할 양심이 없었다. 그냥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다. “벌써 여섯 번쨉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시침을 뚝 떼고 함께 걱정하는 투로 말을 받으면 막내 이모는 또 내가 동생을 찾으러 예까지 온 줄 알고 애먼 사람이 고생한다면서 오히려 나를 달래 주곤 하셨다. 그리고 용돈을 몇 푼 집어 주면 그걸 가지고 또 밖에서 며칠 방황하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다.


   동생은 가출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절대로 그런 식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웃고 오히려 단점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가끔 험하게 나무라셔도 눈 하나 꿈쩍 안 했으며 오히려 배고프니 밥이나 달라는 식으로 능청도 잘 떨었고 싱거운 소리도 곧잘 하곤 했다. 가끔 손위의 외숙이나 이모들이 전화를 해도 동생은 가끔 그분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아무개냐?” 하면서 놀려 대곤 했었다.


   부모님은 그런 아들을 보시면서 ‘저놈이 부모를 모실 것이다’는 생각을 은근히 갖곤 하셨다. 왜냐하면 첫째인 형과 둘째인 나는 성격적으로 부모님과 마찰이 생길 소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셍도 자기가 부모를 모실 생각을 했으며 부인도 아주 착한 여자였다.


   결혼을 하자 자기 가정을 끔찍이(?)도 생각했으며 가끔 부모님 집에 와서는 쓸 만한 것들은 골라 슬그머니 챙겨 가곤 했는데 부모님 눈에는 그것이 또 밉지 않게 보였다. 그리고 형제들이 모였다 하면 동생은 자주 부모님 앞에서 ‘앞으로 유산을 어쩔 것이냐’ 하면서 웃기곤 했었다.


   사실 유산이랄 것도 없었다. 낳아 주신 은혜만 해도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데 무엇을 더 바랄까마는 동생은 그렇게 엉뚱한 소리로 사람을 웃겼으며 가난하지만 기 죽지 않고 재미있게 살았다. 동생이 다니는 회사의 노사 분위기가 원만한 것도 동생의 공이 크다는 말들을 주위에서 했었다.


   그리고 작년이었다. 아무래도 몸이 이상하게 보였지만 본인은 아무렇지 않다고 잡아 떼더니 결국 위암으로 판정을 받은 뒤 4개월 만인 12월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가 53세였다. 의사가 오진을 했다는데 그것도 아마 자기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이상하게 켕기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늘 그랬듯이 형이 받아야 할 죄의 대가를 동생이 또 애매하게 뒤집어쓴 것이 아니냐 하는 직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늘 당하기만 했고 나는 본의 아니게 그 신세(?)를 자주 지곤 했었다, 그게 어쩌면 ‘형’ 이라는 위치에 따라붙는 어떤 프리미엄 인지도 모르지만 동생에게 미안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한참 건강할 때 내게 이런 말을 슬쩍 한 일이 있었다. “나는 불우이웃 이니까 형이 좀 도와줘!” 본래 싱거운 사람이라 그때는 들은 척도 안 했는데, 결국은 그말이 내 귀에 마지막 말이 되었다. 결혼도 늦게 해서 자식사랑이 남달랐는데 그는 정말 불우이웃이 되어 부모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문득 원고지 앞에 앉아 있으려니까 죽은 동생이 불쑥 튀어나와 “어, 강신부!” 하며 그 능청맞은 표정을 다시 짓곤 한다.


   “자식들 걱정은 말고 편히 쉬거라.”



- 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소록도에서온 편지)중에서/강길웅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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